6월 3일 월 : 리추얼 공유회와 역세권도시 투어, 마니또 공개식 까지
이 날은 오전엔 일과가 없는 대신 오후 4시부터 역세권 도시 재생 투어와 리추얼공유회, 저녁식사, 마니또 공개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와 룸메는 조식을 먹고 하릴없이 숙소에서 쉬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숙소 근처 만두집으로 갔다. 나는 찾아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음식이 몇 없는 데 그중 하나가 만두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룸메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잘 맞지? 이 정도면 하늘에서 내 룸메로 점지해 준 수준이다. 둘이 사이좋게 계속 눈독을 들이던 숙소 앞 만주집에서 고기만두 10개를 5000원 주고 구입했다. 만두가 쪄지길 기다리는 동안 옆에 있던 떡집을 슬쩍 구경했는데 그때 간판에 적힌 순천미인 방울기정떡이란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아무래도, 미인인 우리가 사 먹어줘야 하나 조금 고민하다 보니 만두가 다 쪄져서 나왔다. 다음을 기약하며 만두만 든 채 숙소로 돌아왔다. 만두는 잡내가 나진 않았지만 피가 살짝 두꺼운 편이었다. 얇은 피를 좋아하는 룸메친구는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면서 곧잘 먹었다. 나는 만두피가 두꺼운 걸 좋아하지만 이 날 컨디션이 안 좋아서 만두 한 개 반을 겨우 먹었다. 평소 내가 먹는 양을 알고 있는 룸메친구는 깜짝 놀라며 걱정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고 나니 벌써 집합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서둘러 로비로 내려가니 스테이 두루 사장님께서 우릴 위해 수박을 자르고 계셨다. 이렇게 빨리 올 해 첫 수박을 먹게 될 줄이야! 수박은 내가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였다. 두루 사장님은 우릴 위해 항상 뭔가를 내주신다. 정말 너무 감사하다.
도시재생팀과 함께 생태비즈니스 센터를 둘러보고선, 역전길 투어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순천역이 있는 역전길은 도시재생 사업이 한참이었다. 청년들을 위한 여러 가지 지원혜택도 많고, 청년들이 창업을 할만한 '청춘창고'라는 공간도 따로 만들어 제공하고 있었다. 더 큰 도시로 빠져나가는 청년들이 순천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들이 여럿 있었으나 모두 생각만큼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청년창고는 건대의 커먼그라운드와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청년의 활력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공실도 꽤 있었고, 찾아오는 손님보단 대부분 배달 주문을 위주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보여주는 길들에서 그런 분위기가 묻어 나왔다. 뭔가 잘해보려 했으나 잘 안되었다는 그런 느낌이. 하지만 이곳, 역전길에도 예쁘고 개성 있는 가게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고 말하는 도시 재생 팀원분의 말에서 순천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 가게들을 소개할 때마다 마치 자신의 자식을 자랑하는 듯 뿌듯해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그런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게 부러웠다. 그런 애정이 있으니까 살고 있는 마을을 더 좋은 곳으로 가꾸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거겠지. 비록 노력만큼 결실이 보이지 않더라도, 구멍 난 독에 물을 메우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이렇게 순천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 앞으로 순천은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게 분명하다. 지금은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오히려 이런 시행착오들 덕분에라도, 앞으로 순천의 여러 동네들은 더 빛을 보게 될 거란 확신이 생겼다. 확실한 마음은 언제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고, 무기가 되고, 방패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언젠가 보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리추얼 공유회를 마치고 대표님과 함께 서로의 리추얼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표님은 리추얼이란, 결국 의식적으로 행하는 거라고 설명하셨다. 좋은 습관 만들기나 갓생 살기가 아니라고. 그러니 리추얼은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나다워지는지, 내가 내 의식을 가지고 행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고 리추얼을 한 번 재검토해보라고 조언하셨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에게 리추얼은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의식'이고, 어떤 사람에겐 '생활의 위기가 있을 때 리추얼을 지속함으로써 일상의 완전한 무너짐을 막아주는 일종의 안전망'같은 거라고 덧붙이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리추얼을 고쳤다. 나는 아무래도 습관 만들기와 리추얼을 혼동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얼 할 때 완전히 몰입하는지, 어떨 때 가장 의식적이었는지 고민해 보았다. 나는 이번 순천에 오면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내 몸이 나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안 쓰이던 근육들이 나의 의지대로 당기고 수축하는 느낌이 좋았다. 몸이 매우 안 좋았을 때, 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내 마음대로 몸을 완벽히 컨트롤하고 있었고, 그게 느껴지는 게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나는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야 말로 가장 몰입하고, 의식적인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았을 때 산책이야 말로 내 인생의 일부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종일 머리가 멍해도 그때만큼은 혼란한 생각들은 정리가 되고,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던 머리는 드디어 새로운 상상력이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내게 산책은 걷기 그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여기에 '무소음'을 덧붙이기로 했다. 어느 날, 순천에서 이어폰 없이 산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 숨소리와 세상이 내는 소음이 함께 뒤섞여 들리니 정말 내가 이 세상에 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항상 세상과 내가 어긋난다고 느끼던 나였는데 이날만큼은 완전히 동화되어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두 번째 리추얼은 무소음 산책으로 정했다. 마지막 리추얼은 안 해본 것을 시도해 보는 걸로 했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모든 게 도전의 연속이었으니까. 대표님이 알려주신 리추얼 사이트인 '밑미(meet me)'를 참고해서 정해보았다. '내 마음을 알게 되는 발견일기'는 하루 중 마음에 남는 걸 발견했을 때 메모하거나 사진을 찍고 그걸 토대로 일기를 적는 것이다. 마음이 가는 풍경에 눈이 가기 마련이기에, 그렇게 사진을 찍고 일기를 적으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 시선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렇게 시선을 따라 내 마음을 짐작해 보기로 했다. 나는 나를 아직 잘 모르니까, 그리고 더 잘 알고 싶으니까. 나는 그런 마음으로 내 마지막 리추얼을 이걸로 정했다.
그냥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보기로 했다. 늘 멍하던 머리를 맑게 개어내고선 모든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매순간순간이 나로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다시 나를 알아가 보기로, 이미 내가 아는 나에게서 멀어져 버린 나와 친해져 보기로 했다. 나는 앞으로 그렇게 살아보기로, 그리고 그 첫걸음을 이곳에서, 이곳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니 정말 내게 있어 행운 같은 일이다. 나는 가끔 근거 없이 어떠한 확신이 들 때가 있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순천에서의 한 달은 내 인생의 가장 강력한 터닝포인트가 된다, 반드시.
사실 이 날 우리 모두가 기다리던 시간은 바로 마니또 공개식이었다. 뼈해장국과 우거지국밥으로 든든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첫날부터 진행하던 마니또를 공개하기 위해 다시 파랑새창고로 갔다. 여기서 자신의 마니또에게 자신이 마니또임을 들키거나 자신의 마니또를 맞히지 못하면 내일 보성강에 입수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 오늘 아침부터 이 시간을 기다려왔다. 물론, 나는 이미 마니또를 들켜버렸기에 입수가 결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모두 오픈한 결과 10명의 사람들 중 총 7명이 입수자로 선정되었다. 난 나를 마니또로 뽑은 사람을 맞췄다. 세철오빠였다. 별로 숨길 의지가 없었음에도 겨우 맞춘 걸 보아 난 추리를 진짜 못하는 거 같다. 그리고 바로 두 번째 마니또도 뽑았다. 이번엔 내가 세철오빠를 마니또로 뽑았다. 아직도 어색한 사람이라서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내가 누굴 뽑았는지 알 거 같다면서 여러 사람들을 추측했다. 벌써부터 앞 길이 깜깜했다. 인솔자님은 내일 캠핑장에서 마니또에게 편지를 몰래 전해주라는 미션까지 내려주셨다. 막막했다.
우린 아마 마니또게임같은 게 없어도 모두 다 친해질 수 있었을 테다. 모두 다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개성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어떤 조합으로 만나든 케미가 터지고, 즐거운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니또 게임은 우리를 더 강력히 연결해 주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냥 테이프의 접착력으로 서로 붙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마니또게임이 있어서 순간접착제로 붙은 것 마냥 끈끈해졌다. 이제 조금 가족 같기도 하다. 우리 한 달 살이 팀이. 아직 조금 불편한 사람이 있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할 문제인 거 같다. 그리고 여기엔, 우리들의 연결엔,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게 만들겠다는 인솔자님의 강력한 마음도 한 몫하고 있는 거 같다. 언제나 마음은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준다.
이날 밤, 나에게 정말 신기한 일이 생겼다. 문득, 내 룸메친구를 보자 내 옛 친구가 생각났다. 그래서 룸메친구에게 "내 친구 윤혜준을 닮았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혜준이에게 전화가 왔다. 거의 2년 만의 연락이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 혜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룸메는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며 숙소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고, 나는 혜준이와 통화를 하며 숙소 근처를 서성였다. 그러다 보니 나와 룸메는 밖에서 한 네 번 정도를 마주쳤다. 한 명은 숙소에서 통화해도 될 텐데. 혜준이와 나 사이의 시간 공백을 메우느라 통화가 길어졌다. 그 긴 통화 끝에 난 혜준이를 순천으로 초대했다. 그렇게 나와 혜준이는 4년 만에 이곳, 순천에서, 이번주 일요일에 만나게 되었다. 계속 미루고 미루던 혜준이와의 만남을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순천에서 가지게 되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었다. 갑자기 온 연락과 갑작스러운 초대, 갑작스러운 만남. 이 모든 게 우연일 수 있을까? 어쩌면 서로를 향한 마음이 이 날 닿아버린건 아니었을까? 달뜬 마음을 가득 안고서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