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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Jul 11. 2024

DAY9.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순간이 생겼다.

6월 4일 화 :  보성강과 캠핑트립





오전_죽도봉산책&장보기


모자에 앉은 잠자리



조식 먹고 곧바로 캠핑에서 먹을 장을 보러 식자재 마트에 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오늘도 일찍 일어난 나와 룸메친구는 조식을 먹기 전에 죽도봉을 한 번 올라갔다 오기로 했다. 숙소에서 죽도봉 정상을 곧바로 찍고 오는 코스는 아무리 오래 걸려도 1시간이 안 걸려서 아침 산책길로 적절했다. 우리는 죽도봉을 올라가다가 다람쥐도 만나고, 귀엽지만 이름 모를 새도 만났다. 노래 없이 서로의 숨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동식물들이 내는 소리로만 가득 찬 시간이었다. 죽도봉 정상을 오르고 내려오는 길 중간에 발길을 멈추고 스트레칭도 했다. 하체는 제대로 풀지 못했지만 상체만큼은 둘 다 시원하게 풀었다. 경치가 좋으니 몸도, 마음도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참 상쾌한 아침이었다. 조식을 먹고선 모두 함께 모여서 캠핑 음식 재료를 사러 갔다. 일정이 있어 늦게 오는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각자 파트를 나누어 장을 봤다. 언니오빠들은 야채나 술 파트를 맡았고, 나와 룸메는 주전부리 파트를 맡았다. 우릴 믿지 못해서 가장 안 중요한 파트를 준 거 같았다. 하지만 초콜릿과자를 몰래 넣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작은 쫄병스낵도 몰래 챙겨 넣었는데 인솔자님이 확인 과정에서 다 빼버렸다. 과자가 너무 많다고 하셨다. 초콜릿과자도 그 매몰찬 손에 버려졌다. 슬펐다. 그래서 초콜릿 과자를 따로 하나 샀다. 돌아오는 길에, 내 모자에 잠자리가 앉았다.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랑 친구 먹었던 잠자리는 죽었겠지?





오후_캠핑트랩


주암오토캠핑장
보성강에서 마니또 벌칙 수행 겸 미니게임



이른 오후, 인솔자님과 대표님 포함 총 9명의 사람들이 두 대의 차로 나누어 타고선 주암오토캠핑장을 향해 갔다. 민언니와 세철오빠는 오늘 일정이 있어 뒤늦게 합류하기로 했다. 나는 대표님의 캠핑카를 타고 갔는데 본인의 취향에 맞게 모든 내부를 고친 차를 타 본 게 이번이 처음이라 새로웠다. 낭만을 제대로 느끼면서 도착한 주암오토캠핑장은 생각보다 더 현대화된 곳이었다. 완전 리얼 캠핑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난 아직 벌레들과 동침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원래 다 같이 구겨져서 한 곳에서 자자는 입장이었는데 대표님의 캠핑카를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곳을 노리는 사람이 은근히 많아서 조마조마했다. 



모두 짐만 대충 푼 채로 마니또 벌칙 수행 겸 미니게임을 하기 위해 보성강으로 갔다. 나는 별생각 없었는데 보성강 물이 생각보다 차가워서 들어가기 싫어졌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만큼 벌칙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 모두 군말 없이 보성강에 들어갔다 나왔다. 심지어 다음 날 아침, 세철오빠와 민언니가 뒤늦게 입수했는데 그때 세진오빠도 자진해서 또 들어갔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다. 물론, 물안경과 바디슈트까지 챙겨 와서 수영한 세철오빠가 더 대단했지만. 다혜언니는 계속 안 들어가겠다고 말하면서 결국 들어갔는데 막상 들어가니 너무 좋아했다. 계속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거 같다며 감탄했다. 언니가 좋아해서 나도 좋았다. 서로 물장구를 치며 놀다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어버렸다. 입수할 필요 없는 대표님, 지원언니, 혜진언니, 환희언니가 들어올락 말락 간만 보는 바람에 추운데 나가지도 못하고 계속 서있었다. 결국, 지원언니가 총대 매고 들어와 준 덕에 우리도 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웠다. 



아무튼 그렇게 물에 들어갔다 나오니 민언니가 와있었다. 그래서 미니게임을 같이 할 수 있었다. 미니게임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손바닥밀치기, 이어달리기였고, 번외경기로는 신발 멀리 던지기를 했는데 모두 반전이 있어서 즐거웠다. 이어달리기는 짧은 거리였지만 두 번의 역전이 있는 명승부였고, 신발 던지기는 거의 올림픽 수준이었다. 다혜언니 신발이 선 중간에 딱 걸쳐 있었는데 지원언니 신발이 그걸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거다. 그래서 번외 경기는 우리 편이 이길 수 있었다. 미니게임의 벌칙은 설거지하기였는데 번외 경기에서 이긴 덕분에 이긴 팀 한 명을 골라서 설거지를 시킬 수 있었고, 우리 팀은 세진오빠를 골랐다. 다혜언니는 유부녀니까 여기서만큼은 집안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고, 혜진언니는 맏언니라 고르기 좀 그랬고, 룸메친구는 쓸데없어 보였으니 남은 건 세진오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름 치밀한 계산이 들어간 결과였다. 아무튼 즐거운 시간이었다. 근데 너무 추웠다.





캠핑장의 낮



캠핑장의 낮과 밤 모두 좋았다. 추워도 그건 그 나름대로 좋았고, 더워도 그건 그 나름대로 좋았다. 부족하면 부족해서, 넘치면 넘쳐서 좋았다. 준비하고 치울 게 많아도 그건 그대로 좋았다. 말없이 있어도 좋았고, 시끄럽게 떠들어도 좋았다. 배가 불러도 좋았고, 고파도 좋았다. 근데 배고픈 적이 없긴 했다. 목살, 고구마, 감자, 쌈채소, 비빔면, 밥, 파프리카, 그리고 이런 날에 빠질 수 없는 술까지. 가지각색의 새소리와 풀잎소리를 들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세상 행복 별 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이 간단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일부러 더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었던 거 같다. 게스트 하우스 스텝 출신인 민언니가 구운 버섯도 맛있었고, 어쩌다 보니 메인셰프가 된 지원언니가 만들어준 계란말이도 맛있었고, 내가 가져간 비닐장갑으로 열심히 비빈 비빔면도 맛있었고, 고심해서 고른 야채들도 아삭하니 맛있었고, 대표님이 자진해서 사온 고기는 말할 것도 없이 맛있었다. 그 순간의 모든 걸 찬찬히 음미했다. 공기와 소리까지.



세철오빠는 해가 질 무렵에야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나는 모두의 앞에서 세철오빠가 아직 어색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됐었는데. 짓궂은 사람들이 날 더 놀리려고 오빠가 오면 쌈을 싸서 주라고 재촉하고 있었고, 그때 즈음 세철오빠가 등장해 버렸다. 이 사람들은 내가 쌈을 싸줄 때까지 놀리는 걸 끝낼 거 같지 않아서 얼른 쌈을 싸서 입에 구겨 넣어 줬다. 역시 언제나 입 조심을 해야 하는 법인데. 나는 왜 그런 말을 해서 이런 곤경에 처하고 말았을까? 결국 나는 가장 불편했던 세진오빠와 세철오빠 사이에 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아까 까진 맛있는 밥이었는데 그때엔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다. 나는 당황하면 먹는 편이라 그냥 눈앞에 있는 고기를 계속 먹었다. 세철오빠와 어색한 눈 맞춤을 3초나 하고 나서야 이 짓궂은 장난은 일단락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이건 음미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땔감을 나르는 주인 없는 씽씽이



어둑한 밤이 되자 세철오빠가 가져온 조명을 설치하고 (왜 준비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불멍을 위해 모닥불을 피우고 나니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세철오빠가 땔감을 어디선가 가져오고, 계속 불이 꺼지지 않게 신경 써 준 덕에 춥지 않을 수 있었다. 놀이터에 굴러다니는 씽씽이에 땔감에 쓰일 나무를 가지고 오는 모습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약간 천재 같았다.





캠핑장의 밤



2차전으로 구운 고구마와 감자, 그리고 마시멜로를 먹으면서 각자의 '희노애락' 중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간 게 아니라 인솔자님의 의도가 다분히 섞여있었다는 게 아쉬운 점이었지만. 그래도 모두 자신이 여기서, 지금 이 순간 드러낼 수 있을 정도까지 이야기해 주었다. 다들 공감이나 위로를 바라고 말한 건 아니었던 거 같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때 섣부른 위로나 어설픈 조언, 그러면서 누군가의 슬픔의 정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아픔만 내세우는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드러냄만 있었던 시간이었던 거 같다. 치유는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남겨주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꺼내진 주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부감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꺼내보였을 때 여기선 그 아픔을 하찮게 여기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어서였다고 생각한다. 서로 많이 친해져서였다기 보단 그 믿음이 있어서 말할 수 있었던 거라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닐 거란 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면서 룸메친구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울었다. 그러고 나서 자리를 조금 정돈하고 잘 사람은 자러 들어갔다. 세철오빠는 혜진언니가 설치해 놓은 해먹에 들어갔다. 일단 제정신으로 깨어 있었던 건 나와 환희언니, 인솔자님, 대표님, 그리고 세진오빠정도였다. 나는 과자를 먹고 바로 들어가려 했는데 무슨 말만 하면 세진오빠가 웃어서 좀 더 있었다. 그 반응이 너무 웃겼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엉덩이로 뛰면서 웃지?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이톤으로 웃는 남자를 처음 봤다. 남자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은 세진오빠와 세철오빠가 모두 깨버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날 나는 내 인생 첫 번째 소녀팬을 만들게 된 거 같다. 바로, 세진오빠다. 밤이 더 깊어지니 대표님께선 나에 대한 질문을 더 하셨다. 내 우울엔 이유가 없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그래서 나는 그 원인이 될 수 있는 일들을 추측해서 말했다. 인생에서 소중하고 사랑했던 사람을 너무 일찍 일은 탓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뚜렷한 원인이 아닌 거 같다. 모든 상황과 성향과 타이밍들이 만들어낸 우연인 거 같다. 감정이란 게 뚜렷한 원인을 찾아 제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확고한 시점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면, 그냥 뚜렷한 원인을 찾지 않고 내버려두고 싶다. 어차피 내 마음엔 하루에도 수십 개의 감정이 드나들고, 그 모든 감정에 원인을 찾아 붙일 수 없는 거라면, 종종 찾아오는 우울감도 이유가 부재한 채로 놔두고 싶다. 방치라고 말해도 부정할 순 없다. 어차피 난 이미 강의 하류에 도착해 있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여력은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나의 밤은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막을 내렸다. 막을 내리기 전에 먼저 자러 들어간 사람들이 난방을 끄고 자길래 난방을 켜주었는데 그땐 아무도 몰랐다. 그 난방이 그렇게 뜨거울 줄은.(바닥에서 자고 있던 다혜언니는 불에 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나에게 이날 밤은 좀 특별한 밤이었다. 처음으로 룸메친구와 떨어져서 따로 자는 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텐트에서 자보는 날이었다. 나는 지원언니와 환희언니랑 대표님 차 위에 설치된 텐트에서 잤다. 침낭도 처음 써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색다르고, 낭만적인 밤이었다. 낭만적인 하루였다. 잠에 드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이날 하루의 모든 순간을 찬찬히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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