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금 : 포럼 참석, 선암사, 바하마, 코인노래방까지
오전엔 원래 시티투어를 할 예정이었으나 포럼 참석으로 일정이 변경되었다. 한 달 살기 프로그램 목적과 포럼 주제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생각 없이 갔으나 생태 비즈니스센터의 쾌적한 환경과 맛있는 다과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란 참 단순한 동물인 거 같다. 막상 포럼이 시작되자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강의라 그런지 생각보다 재밌었다. 처음엔 교수님이 나오셔서 '정원도시, 순천'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고, 그다음엔 재주상회 분이 나오셔서 로컬라이징 성공 사례들을 짚어주셨으며, 마지막으론 도시재생과 과장님이 나오셔서 현재 순천에서 진행 중인 도시 재생 사업들에 대해 알려주셨다.
포럼을 통해 알게 된 순천은 여타 다른 지방도시들에 비해 상황이 좋은 편이었다. 유출 인구가 적고, 인구의 연령분포도 전국 평균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내가 비록 약 삼 주간 순천에 살아본 결과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기 편하고, 생태도시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자연친화적이었기 때문이다. 순천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경험한 사람이라면 쉼과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마치 철새가 돌아오듯 순천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쇠퇴하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순천이 나은 처지이며 더 나아갈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는 바였다. 다만, 진오빠의 질문에 제대로 된 응답을 듣지 못했던 건 조금 아쉬웠다. 분명, 가능성이 보이는 상황이고, 그리고 모두 순천이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데, 그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한 거 같았다.
유독 순천은 홍보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거 같다. 전에 순천으로 초대한 친구도 집에 가는 날까지 순천을 속초라 부를 정도로 순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순천에서 하루를 지내고 나선 순천에 더 있고 싶어 졌다고, 다른 지역보다 순천이 좋았다고 말했었다. 그동안 지내면서 순천이 좋았던 건 이동하기 쉽다는 점이었다.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길도 자전거를 통해 갈 수 있었다. 심지어 한 달에 3000원만 내면 무제한으로 이용 가능해서 가격적인 부담도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동천 아래로 내려가면 오천만 그린광장, 순천만 국가정원, 순천만 습지까지 갈 수 있었다. 위로 올라가면 중앙동 문화의 거리와 웃장 국밥골목까지, 그리고 그 너머까지도 갈 수 있었다. 그 옆 샛길로 쭈욱 달리다 보면 윤슬길을 거쳐 광양까지도 갈 수 있었다. 운전을 할 수 있다면 차로 40분이면 여수에 갈 수 있고, 좀 더 욕심을 부리면 고흥까지 가서 서핑을 할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ktx를 타고 하동으로, 또는 담양으로도 갈 수 있다.
단점이 있다면 도보로 이동하기가 불편했다는 점이다. 유독 신호가 더디게 바뀌고, 그렇게 바뀐 신호는 다시 빨간불로 너무 빠르게 바뀐다. 교차로에서 신호등 두 개만 건너면 벌써 등에 땀범벅이다. 심지어 그 짧은 신호조차 기다리지 않고 지나가는 차들이 많았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 서 있으면 멈추는 차들이 없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신호를 기다리지 않고 무단횡단하는 어르신들이 이해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람이 적은 길은 어쩔 수 없다고들 말했지만 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난 뚜벅이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 그런 거 같다. 무엇보다 길 자체도 깨진 부분이나 팬 부분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 자전거도로라고 표시되어 있는 부분들도 중간중간 장애물들이나 울퉁불퉁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느낀 감상은, 순천은 보행자에게 불친절하다는 거였다.
오후엔 인솔자님과 순천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던 '벽오동'에 갔다. 정말 그 칭찬들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모든 음식들이 맛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아서 밥에 그냥 반찬을 올려 먹었는데 모든 밑반찬들이 환상적일 정도로 맛있었다. 구색 맞추기용 반찬 없이 모든 반찬이 메인이었다. 너무 바쁜 시간에 가서 애호박 전 리필이 안된 건 아쉬웠지만 다른 것도 다 맛있어서 괜찮았다. 양념게장과 도토리묵, 쌈야채를 한 번씩 리필하고 나서야 식사가 끝났다. 고기류 제외하고 모든 밑반찬이 리필된다는 것도 놀라웠고, 후식으로 수정과를 마실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여긴 정말 순천 맛집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배를 열심히 채우고 나서 차를 타고 선암사로 향했다. 여기 길은 산길이지만 그렇게 험하지 않고, 오르막도 높지 않아서 올라가기 수월했다. 가다가 중간에 포토존으로 유명한 무슨 다리 같은 곳이 나왔다. 분명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을 거 같았는데 보이지 않아서 지원언니랑 두리번거리다가 내려갈만한 좁다란 길을 발견했다. 내려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원언니가 한 번 가보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어서 냉큼 내려갔다. 역시나 내려가서 찍으니 사진이 너무 예쁘게 잘 나왔다. 신발을 벗고 계곡물에 한쪽 발도 살짝 담가보았다. 나는 확실히 순천에 와서 다른 사람 눈치 보는 게 줄었다. 그 덕에 하지 못했을 행동을 마음껏 하고 있다. 이런 나 자신이 만족스럽다.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기도 하고, 찍히기도 하고선 다시 올라왔다. 아직 선암사가 나오려면 조금 더 가야 했기 때문이다.
선암사에 오르고 나서는 각자의 흥미에 맞게 돌아다녔다. 진철오빠들은 해설사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선암사를 둘러보고, 여자들은 두 그룹으로 대강 쪼개져서 둘러보았다. 나는 중간에 위쪽이 궁금해져서 이탈했다가 다시 언니들이 있는 곳으로 합류해서 그늘에 앉아 쉬었다. 그 김에 귀여운 다람쥐도 볼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잔잔히 둘러보는 건 흥미가 없는 거 같다. 해설 듣는 건 정말 싫다.
선암사를 다 보고 내려오는 길에 야생차 다례체험관을 들렀다. 1인 당 3000원에 순천 야생차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원래 다도에 영 흥미가 없는 데다가 덥고 지쳐서 그저 숙소로 가고픈 마음뿐이라 반쯤 감긴 눈으로 있었다. 다례체험을 진행하시는 선생님이 갑자기 인생과 자식 이야기를 하시자 그나마 남아 있던 흥미가 모두 사라져서 영혼을 반쯤 빼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 인생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팀원들은 흥미롭게 듣는 눈치였다. 다행히 구석에서 철오빠가 자고 있어서 나도 마음 편히 딴짓을 할 수 있었다. 역시 든든하다. 국밥 같다.
선생님께선 갑자기 흥이 나셨는지 예전에 노래를 배웠다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장구를 들고 나오셔 선 장구를 치며 노래를 시작하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아리랑이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따라 부른다고 해도 그때의 느낌을 우리에게 전달할 순 없었을 거다. 애환 어린 목소리에서 나오는 울림 같은 건, 쉬이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선생님은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그 때야 비로소 선생님 인생의 굴곡들이 궁금해졌다. 삶이 버거워 노래를 배우셨던 거 같다. 그렇게라도 몸 안의 슬픔을 바깥으로 꺼내보려 하셨던 거 같다. 인생의 어떤 갈림길에서 어떤 고민을 거치셨던 걸까. 그래서 어떻게 지금 다례체험관 선생님이 되어 우리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계신 걸까? 그렇게 모두에게 감동을 준 노래를 마치고선 선생님은 자리를 떠나셨다. 우린 그대로 바닥에 누워 5분 정도 있다가 숙소로 향했다. 다들 힘들고 지친 데다가 따듯한 차까지 마시니 온몸이 노곤노곤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숙소로 오니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프로그램을 마치고 곤죽이 되어 숙소로 들어오면 다시 쌩쌩해진다. 왜일까? 둘 중 하나인 거 같다. 사장님들이 숙소에 에너지파우더를 뿌려놓았거나 아니면 우리가 밤 체질이거나. 그렇게 들어오자마자 대충 갈무리만 한 채 환희언니와 역전길 쪽에 있는 '므네메'로 갔다. (*참고로 여긴 전에 먹었던 그릭 요거트집이다) 다른 사람들은 풍미통닭에 생맥주를 한 잔씩 먹으러 갔지만, 우린 가지 않았다. 우린 내일 촬영이 있어서 관리를 해야 했다. 연예인들의 삶은 이런 걸까? 여하튼 므네메에서 요거트를 포장해서 먹고, 거기서 서비스로 준 모닝빵과 그릭요거트와 블루베리잼도 먹고, 과자도 먹고, 구운 계란과 삶은 계란도 먹고 나서 저녁식사를 마쳤다. 이렇게 보내기엔 밤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풍미통닭을 먹고 돌아온 룸메에게 유혹적인 포즈를 취하며 같이 바하마에 가자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 룸메친구가 이미 혜진언니와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셋이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룸메친구에게 배신자라고 말하면서도 동행하기 위해 주섬주섬 나갈 준비를 마쳤다. 룸메친구가 못 본 사이 인기쟁이가 되어 있었다.
바하마는 숙소 사장님도 추천해 주셨던,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칵테일 바였다. 계속 가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아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저번에 룸메친구 혼자 이곳에 왔다가 재밌는 일들을 가득 가져왔다. 그래서 이번에 큰맘 먹고 갔다. 왜 큰 맘을 먹을 수밖에 없었냐면,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술을 먹지 않는 밤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런 희귀한 날엔 간을 조금 쉬어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바하마에 대한 궁금증이 그걸 이겼다. 여기 바 사장님과 두루 사장님은 친분이 있다고 들어서 더 궁금했다. 나는 호기롭게 주문한 칵테일이 입맛에 맞지 않아 조금 홀짝이며 안주만 집어먹었다. 여기는 기본안주로 크래커와 마요네즈게살무침 또는 견과류와 초코볼이 나온다. 딱 내 스타일이었다. 조금씩 얘기를 하다 보니 같이 갔던 혜진언니가 남자친구가 왔다면서 남은 칵테일을 원샷하고 가게를 나갔다. 나는 이제껏 언니의 그토록 깊은 보조개를 본 적이 없었다. 남자친구란 대체 뭘까? 원래 연애에 관심 없었는데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연인이 있는 언니들이 다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지원언니도 행복해 보이고, 룸메친구도 나름 뭐... 그래. 무엇보다 혜진언니의 환한 미소와 깊게 파인 보조개, 한달음에 달려 나가는 그 설렘 가득한 발걸음이 가장 인상 깊었다. 남자친구란, 그 정도로 행복해지는 존재인 것인가?
칵테일 바 자리에 앉아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했다. 사장님은 예전엔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이젠 혼자가 좋다고 하셨다. 그리고 원래 제주도를 가려했으나 일정이 꼬여 고흥을 갔고, 거기가 너무 좋아 휴가를 그냥 거기서 보냈다고 하셨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들린 회가 너무 맛있었다고, 그리고 이 얘기를 하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고도.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장님 지인 분 한 분과 어떤 나이 지긋한 손님이 오셨다. 다행이었다. 사장님과의 대화는 너무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분이신 거 같긴 하지만 좋음과 어색함은 개별의 문제였다. 사장님은 갑자기 지인에게 철길이 관광지로서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물으셨다. 그 지인분은 고개를 저으셨다. 확실히 사장님은 내향적인 분이신 게 맞다. 아는 분이 오시니까 텐션이 조금 올라가신 걸 보니 그런 확신이 들었다. 대체로 내향적인 사람들은 아는 사람의 쪽수가 낯선 사람의 쪽수를 상회할 때 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코인 노래방 마감 시간이 다가와서 우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나오니 사장님이 내일 회를 같이 먹자고 바하마에 초대해 주셨다. 우린 둘 다 먹는 걸 좋아해서 냉큼 좋다고 하고선 바로 옆에 있는 코인 노래방에 갔다. 나랑 룸메는 각자 방을 따로 잡고선 1000원어치만 부르고 나왔다. 딱 좋았다. 역시 룸메친구다. 그러고 나서도 아직 기운이 남아서 숙소 주변을 2.3바퀴 정도 돌다가 들어갔다.
그러고 보면, 이 날은 정말 순천에서 살고 있는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본 날이었다. 다례체험관의 선생님부터 바하마의 사장님, 그리고 그 바의 손님들까지. 이것저것 배우다가 노래를 배우게 되었다는 선생님의 인생이, 예전과 달리 혼자가 좋다는 사장님의 인생이, 금요일 밤에 막걸리 하나를 들고 바에 찾아온 사장님 지인의 인생이, 그리고 세종에서 차를 타고 이 바를 찾아왔다는 나이 지긋한 손님의 인생이, 문득 더 궁금해지는 밤이었다. 타인의 인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내가 순천에 오고 나서 달라진 것 중 하나다. 이런 변화가 싫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