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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95호 물결 20화

[오아시스] 파도가 물결이 되기까지

소롱

by 상경논총

2025년 상반기, 한국이라는 ‘바다’에 또 한 번 큰 풍랑이 불어 닥쳤습니다. 그 풍랑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파도가 코앞에 닥치기도 전에 불평하고 걱정하기보다, 일렁이는 잔물결에 우선 몸부터 맡겨봅니다.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파도 속으로 뛰어들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자극에 우리는 과민해서도, 무반응해서도 안 됩니다. 항상 눈과 귀는 열어 두되, 적절한 감정과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그 누구도 정확한 균형을 감히 정의할 수 없기에, 이론상 최적의 균형점에 도달하기보다 수렴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균형을 지키는 삶의 자세를 현학적으로 ‘중용’이라 일컫습니다. ‘중용’을 유지하는 것이 당연한 덕목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물결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휘둘리다보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사실 ‘중용’을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누군가와 친해지기도 전에 그 사람의 성향을 멋대로 속단하고, 제 마음에 든 친구들만 옆에 두며 편향적인 관계를 쌓았습니다. 학창시절, 대학이라는 목표만을 바라보며 과열적으로 경쟁한 끝에 많은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고 폭넓은 인간관계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군대시절 조교를 하며 부족한 교육생들을 돕지 못하고 윽박지르던 기억도 납니다. 항상 세상의 물결을 멋대로 통제하려 든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던 까닭에, 전역 이후 ‘중용’을 제 마음 속에 새기기로 다짐했습니다. 복학 후 상경논총을 통해 본격적인 대학생활과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는데, 두 학기 동안 수습부원에서 편집장까지 양 극단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때이른 감투에 자칫 ‘중용’을 잃어버리고 멋대로 한 것이 아닌지 끊임없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믿음직스럽되 사납지 않고, 부지런하되 서두르지 않으며, 여유롭되 게으르지 않은 편집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일렁이되 흔들리지 않고, 잔잔하되 침묵하지 않는 물결처럼.


과외를 하다 보면, 공부할 의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욕심과 고집에 이끌려 공부를 하는 시늉을 하는 학생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사교육에 그렇게 많은 돈을 부었는데 왜 성적이 오르지 않는지 학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군대에서 다소 서툰 후임들이 실수를 할 때마다 쥐잡듯이 잡는 선임들이 있습니다. 한 번의 따끔한 경고는 업무 기강을 잡고 능률을 올릴 수 있지만, 숨 쉴 틈 없이 들어오는 질책은 오히려 후임들을 강박에 몰아넣어 더 큰 실수를 유도하거나, 그 실수를 숨겨 큰 화를 불러옵니다. 대외활동이나 직장 등에서 다른 이들의 업무에 사사건건 간섭하여 일을 망쳐버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상대방 혹은 상황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필요한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중용’의 미덕은 방임과 개입 사이에서 아찔하게 발휘됩니다. 자유롭게 두되 방임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상황을 유연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개입보다 간접적인 영향력을 통해 상대방을 움직이고 상황을 재치있게 변화시킵니다. 도움이나 개선이 필요한 학생, 후임, 팀이 있다면 모든 사항을 정하고 이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대신, 최소한의 제약이나 규칙 하에서는 자신만의 자율성을 꽃피우게 두는 편이 낫습니다. 팔꿈치로 슥 찔러 상대의 행동을 유도한다는 뜻의 ‘넛지(nudge)’가 ‘중용’의 행동경제학적 동의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상황을 풀어나가는 ‘보이지 않는 손’을 경제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나 여전히 사람들은 상황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강인한 이미지에 본능적으로 반응합니다. 하물며 애인을 고르는 것부터 표를 던질 정치인을 선택하는 것까지, 우리는 더 큰 자극과 훨씬 강한 사람을 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물결’보다 ‘파도’에 본능적으로 열광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한 번 강하게 몰아친 파도가 당장 눈에 띈다 해도, 곧이어 오는 더 큰 파도에 우리는 이전의 파도가 일으킨 파장을 언제 봤냐는 듯 망각합니다. 더 맛있는 음식, 더 비싼 옷, 더 높은 학벌, 더 좋은 직장, 더 많은 친구, 더 높은 수익, 더 재밌는 영상. 더 큰 파도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더 큰 ‘자극’만을 기다리는 소시민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조심스레 제 자신을 반추해봅니다.


허무한 결론이겠지만, ‘파도’처럼 목에 핏대를 세워 울고부는 세대가 아닌 ‘물결’처럼 잔잔하게, 하지만 은은하게 사랑을 퍼뜨리는 세대가 되길 소망합니다. 성급하게 누군가를 속단하고 상황을 단정하기보다는, 기회와 아량을 베푸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는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두서 없이 난잡한 제 글을 끝까지 읽으신 독자분들은 충분히 그러한 멋진 삶의 자세를 이루실 것이라 감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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