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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다 Oct 13. 2022

주문하고 안 찾아가는데, 다행이라고요?

돈의 빨간 맛을 보다

전화벨이 울린다. 주문 전화다.


“H주얼리(가명)이에요.

2514번 제품 14k 화이트로 사진대로 주문할게요”

“네 사장님, 견본 사진 카톡으로 보내주세요”

“네, 얼마나 걸려요?”

“영업일 기준 7일 정도 걸리고, 나오면 연락드릴게요”

“네”


일주일이 흘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주문하신 제품 나왔습니다. 순금 11돈, 15만 원입니다’ 소매점에 카톡을 보냈다.

‘네, 찾으러 갈게요’


일주일이 다시 흘렀고 카톡을 또 보냈는데 이번에는 답이 없다. 보통은 나왔다고 알리면 일주일 안에 찾아가는데 2주나 지났다. 뭔가 좀 이상하다.


전화를 걸었다. 받는다. 다행이다.

“제품 나왔습니다. 찾아가세요”

“네, 얼마예요?”


“카톡에 적어드렸는데.. 확인 안 하셨나요?”

“.. 찾으러 갈게요”


“언제 오실 거예요?”

“결제받아서 갈게요”


그제야 소매점에서 주문한 게 아니라 ‘중상인’의 주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상인은 소매점으로부터 주문을 받아서 도매점으로 주문을 넣고, 제품이 나오면 소매점에 가져다주고 일정 수수료나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다. 소매점이 도매점이 몰려있는 종로로부터 멀거나 주인이 자주 종로에 오기 어려운 경우 중상인을 고용하여 종로 일을 보게 하는 것이다.


중상인은 보통 자기 ‘이름’으로 주문을 넣는데, H주얼리라고 한 것이 수상했다. 실제로 있는 곳이 맞을까 싶었다. 이름으로 검색해서 매장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전화를 걸자 나의 친정엄마 뻘 되는 여자분이 전화를 받는다. 주문은 남자가 했다.


“남자분이 H주얼리 이름으로 주문을 했는데 찾아가질 않고 있어요. 직원인가요?”

“우리 아들인가 본데 아들하고 직접 통화하세요. 여기 매장에서 주문한 게 아니라 그 아이가 자기 이름으로 하는 사업에서 한 거니까”

“한 달이 넘었어요 안 찾아간 게요. 아들이시면 찾아가라고 말씀 좀 전해주시겠어요?”

“내 일이 아니라니까요. 아들도 성인인데 내가 뭐라고 할 일이 아니에요”


기가 찼다. 아니, 우리 친정엄마랑 너무 다르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들이 주문하고 안 찾아가는데 팔짱만 끼고 있겠다니. 그렇게 사업하면 안 된다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적어도 찾아가라고 말은 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금액으로 환산해보니 200만 원이 넘었다. 거기다가 주문한 색상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기성’이 아니었다. 제품 가운데에 블랙 도금을 하고 테두리에 화이트로 도금을 했었다. 고객의 요청에 의해 변형 주문이 들어갔던 제품인 거다. 그렇게 ‘기성’ 아닌 제품은 다른 소매상에서 사갈일도 만무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H 주얼리에 찾아가기로 했다.


주문하고 안 찾아가는 건 사기죄에 해당하는 거 아니냐며. 씩씩거리는 발걸음으로.


중상인은 그곳에 없었고, 그의 엄마만 있었다. 왜 주문하고 안 찾아가냐고 따졌다. H 주얼리라는 상호를 썼으면 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본인 사업체와 아들 사업체는 다르다는 말만 반복하는데 더 뭐라고 할 말도 없어 터덜터덜 돌아왔다.




내가 직접 매장까지 찾아가자, 한 달 넘게 독촉해도 안 오던 사람이 그다음 날 바로 나를 찾아왔다. 똑같이 씩씩거리며. 아니 나를 잡아먹을듯한 얼굴로.


엄마 매장에 찾아갔던 게 꽤나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 나는 친정 엄마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엄마가 중재하셨다. 중상인에게 일을 맡긴 소매점 사장이 연락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젊은 사람들이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며 서로 사과를 하게 하셨다. 나는 매장에 찾아간 것에 대해. 그도 우리 매장에 찾아온 것에 대해서만.


사과도 받지 못한 그 주얼리는 내가 떠맡게 되었다. 게다가 진열해 놓은 다른 제품들과 어울려 섞이지도 않고 나 홀로 튀는 색과 모양이었다. 속이 상했다. 200만 원이 그대로 내 손해라는 생각이 든다.


상황을 지켜보시던 앞 매장 사장님이 말을 건넨다.


“안 찾아가서 다행이야.
물건은 남았잖아.
찾아가고 나서 결제 안 해주는 경우도 있는데”


“주문하고 안 찾아가는 데, 다행이라고요?”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첫 수업료를 냈다. 이후에 더 큰 수업료도 냈지만, 첫 사건은 뇌리에 크게 자리 잡았다.


다행이라는 말,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뼛속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사업을 지속하고 경험이 쌓이며 알게 되었다. 찾아가지 않은 제품이 팔리지 않아 금을 녹인다면 몇 십만 원 손해지만, 찾아가고 나서 돈을 안 주면 몇 백만 원 손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일이 왕왕 일어난다는 것을.


그 후부터는 주문을 넣을 때 선입금을 전혀 주지 않는 종로의 문화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큰 주문의 경우에는 소매점에 얘기해서 받기도 했다. 또 주문만큼 출고와 결제를 잘 받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애물단지 노릇을 톡톡히 하며, 꽤 오랫동안 쓰라린 기억을 되살리게 하던 그 주얼리는 결국 임자를 만나 팔렸다. 재 주문까지 들어왔다.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기호가 존재한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또, 찾아가지 않은 재고를 감당하는 일은 사업하는 사람에겐 ‘다행’ 정도의 일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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