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끝났다는 사실이 어제 야근을 미뤄두고 금형과의 약속을 나간 미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오늘은 꼭 시장조사까지 마치고 보고서 윤곽까지는 잡아야겠어.’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사무실에 털렁 앉은 미리는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어제의 일이 현실 속에 데쟈뷰처럼 겹쳐지는 걸 느꼈다.
‘금형님은 마음이 좀 괜찮아졌을라나.’
‘투둑투둑’
조용한 사무실에서 타자 소리가 공명처럼 울려퍼졌고, 그제서야 미리는 보고서의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퇴근을 했지만 미리의 머리 한켠에는 고부장의 얼굴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일하다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미리는 보고서를 대략 마무리하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나왔다.
도시의 건물을 뒤로하고 걷는 밤거리는 꽤나 청량했고, 숙제를 끝낸 듯 홀가분한 마음이 집에 가려는 그녀의 발길을 돌려놓았다.
“금형님, 지금 뭐해요?”
무심코 그에게로 메시지를 보내는게 꽤나 자연스러워졌다는 점에서 미리는 마음에 안정이 들었다.
분명히 그를 만나려고 한 게 아닌데 미리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금형이 사는 집쪽을 향해 건널목을 건넜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20여분간 회사 앞 주변에서 목적 없이 서성이는 동안 금형의 답변이 돌아오지 않자 미리는 갑자기 큰 실망감을 느꼈다.
‘그래. 시간이 너무 늦었지. 집에 가자. 내일 또 고부장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고.’
‘음 귀찮은데 택시를 탈까? 아냐 오늘은 맨정신인데 버스 타고 가야지.’
미리는 중앙 차로 정류장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정류장 끄트머리에는 고부장 나이대의 넥타이를 멘 남자들 여럿이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서로에서 소리를 치고 있었다.
“아 안그런가? 그 김이사 그거 말이야. 언제부터 지가 이사였다고. 참 내일 서류보관함에서 새로 나온 명함 픽업하는거 잊지 말라고.”
순간 미리의 머리 속에서 번개가 지나가듯 생각이 떠올랐다.
‘아 맞다. 심대리가 확인하라고 했던 게 있었지. 내일 꼭 찾아가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