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자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 그들을 제대로 위로해주고 싶을 때
사고트라우마와 사별의 슬픔을 동시에 겪는 감정은 겪어보지 못했던 슬픔을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비현실적인 멍한 무감각, 부정, 원한, 두려움, 죄책감, 분노, 증오, 공포감, 비탄, 비통, 상실감, 허전함이라는 감정을 매일 겪어야 했다. 한마디로 고통스러웠다.
사고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 나를 미치게 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사별의 고통은 강제로 뒤로 미뤄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고로 잃었다는 자체가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케니가 잠시 어디 간 거라고 퇴원하고 집에 가면 케니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 여동생이 처음 케니가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내게 알렸을 때도 너무 말이 안 돼서 스스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온몸으로 부정했다.
'케니가 많이 다쳐서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 설마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케니가 하늘나라로 먼저 갔을 리가 없어.'라고 마음속으로 케니가 살아있다고 믿었다. 나와 케니가 사고 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고 기억도 나지 않으니 비극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친 내 몸과 수술한 부위의 고통이 심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온몸을 갈기갈기 찢는듯한 고통으로 나는 간호사에게 진통제와 수면제를 부탁했다.
현실도 꿈이지도 않은 비현실적인 끔찍한 세상을 계속 회피했다.
사고 일주일 후, 케니의 장례식이 있는 날에도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수술한 후, 극심한 통증을 앞세워 매일 잠으로 도망쳤다.
다행히도 사랑하는 가족이 한국에서 토론토로 날아와서 내 곁을 지켰다.
엄마 아빠는 내가 이렇게 두 눈을 뜨고 살아있는 것만으로, 척추를 다치지 않고 마비가 오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해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내 마음을 걱정하는 것도 물론 있었지만 부모님에겐 내 건강이 우선이었다.
당연해 보였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의 건강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첫째 딸 콤플렉스를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부모님 앞에서는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을 했다.
힘들다고 하면 부모님이 더 힘들까 봐 항상 씩씩한 모습을 보여왔었다.
이번 사고로 놀란 부모님은 사별을 겪는 내 마음보다는 부모로서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엄마는 케니를 잃은 슬픔과 딸 걱정 때문에 오히려 엄마가 나보다 더 감정이 요동치는 모습을 보였다.
엄마가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도저히 엄마 앞에서 나의 힘든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엄마를 안심시키고 위로했다.
아픈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했고 어떻게 딸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는지 밉기도 했다.
내 곁을 지켜줘서 진심으로 감사했지만 딸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본인의 감정만 표현할 수가 있을까.
아빠는 너무 이성적이었다. 아빠는 토론토에 혼자 남겨질 내가 앞으로 단단하게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나 보다.
의사는 가족에게 내가 재활치료를 잘 받으면 시간이 지났을 때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두 발로 온전히 걸을 수 있다고 하셨다.
뇌가 피를 흡수에 뇌졸중의 위기를 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하셔서 가족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큰 위기를 넘긴 내게 토론토에서 어떻게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했고 말씀하셨다.
토론토에서 혼자서 살아가려면 경제적으로 독립적으로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
내가 회복하는 시간 동안 현실적으로 생활비와 거주비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말씀하셨다.
"아빠 솔직히 지금 아빠가 나한테 하는 말들은 내게 중요하지 않아 위로가 되지 않고 나를 더 두렵게 만들고 힘들게 해. 미래에 대한 말 말고 현재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버티고 있는지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물어봐주고 기다려주면 안 돼?
미래에 관해서는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없어 아니 케니가 없는 미래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그가 내 곁에 없는 것만 생각해도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이 힘들어. 돈이고 뭐고 내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내 마음이 살고 싶지 않고 온몸이 죄책감으로 뒤덮여있는데 다른 것들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나를 위로하고 싶었다는 것을 잘 안다.
나도 사고와 사별이 처음이고 가족들도 사별을 겪은 딸을 위로하는 것이 처음이다.
물론 처음이어서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니까 내게 어떤 말을 건네어야 하고 행동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나는 케니랑 미래를 그리며 매일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그려왔던 세계가 무너지니까 미래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밝은 미래란 내게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아빠는 일 때문에 곧 한국에 가야 했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 내게 미래에 대한 말을 한 것은 이해했지만 아빠는 내 마음이 어떤지 깊게 알려고 하지 않았다.
정작 진짜 내 마음을 물어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곁에 가족이 있었지만 외로웠다. 케니가 더 보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케니만이 내 마음을 유일하게 물어봐주고 알아주는 존재였다.
그 누구도 케니의 역할을 해줄 수 없다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내게 병문안 오는 사람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시간이 흐르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케니와 나의 사이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흘러 케니의 죽음이 괜찮아지는 게 싫었다.
케니를 생생하고 또렷하게 매일 기억하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케니의 부재가 괜찮아진다는 것은 내가 케니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케니와 서로 포옹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웃고 서로 기대어 드라마를 볼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 생생한 느낌을 또렷하게 가지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괜찮아지겠지. 그걸 누가 모르는가 나도 다 아는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서 케니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괜찮아지고 싶지 않았다. 어떠한 힘듦과 고통에도 케니가 내 옆에 있기를 바랐다.
위로를 한다는 말이라고 '살사람은 일단 살아야지. 케니가 원하는 건 네가 잘 살아가는 것일 거야.'라는 말도 정말 듣기 싫었다.
사고로부터 나만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나한테, 사고의 원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한테 사는 것은 지옥이었다.
내 감정도, 나의 정확한 상황도 모르면서 위로해 준다고 하는 말들이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물론 그분들은 나를 위해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기 위해 나를 찾아오고 건네는 말인 거 알고 있다.
그분들도 사별하는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처음일 수도 있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안다.
내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데 위로의 말은 전해야겠고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 잘 안다.
나도 사별을 겪지 않았으면 어떤 위로가 도움이 되는지 몰랐을 것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사별자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별을 겪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과 말이 위로가 될 수 있는지 적어보려고 한다.
물론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적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을 감수하면서 들어줬으면 좋겠다.
일단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 "솔직하게 내가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았고 처음이라 위로해주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라고 말해도 괜찮다.
그리고 사별자를 안아주고 손을 잡아주자.
아무 말을 안 해도 등과 손을 토닥토닥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사별한 사람이 울음을 터트리고 감정을 표현할 때는 가만히 들어주자.
감정을 표현할 때 감정이 북받쳐서 말을 하다가 멈춰 울 때는 토닥여주고 "괜찮아 지금 어떤 감정이 드는지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돼."라고만 말하고 기다려주자.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따뜻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기다려주면 된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나의 상황을 공감해 준다고 친구가 부모님을 떠나보내야 했던 경험을 내게 얘기했었다.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케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친구의 얘기를 들어줄 에너지가 부족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힘이 없어 케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생각하는 존재가 사라졌으니까 나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다고 생각이 들었다.
케니 말고도 나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친구들이 나를 계속 생각해 주고 걱정해 주기를 바랐다.
사별을 겪는 사람에게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표현은 꾸준히 해줘야 한다.
마음이 어떻냐고 물어봐주고 오늘은 어떠냐고 물어봐주는 것만으로도 사별을 겪는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
사별자는 혼자가 됐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배우자 말고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지독하게 외로움을 느낀다.
꾸준하게 전화를 해서 나는 당신을 걱정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고립감을 느끼는 사별자에게 위로가 된다.
전화를 했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이렇게 말해보자.
"네가 어떤 슬픔을 감당하고 있는지 솔직히 상상이 안되고 감히 말을 못 꺼내겠어 내가 너 옆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가 외로울 때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나는 이 경험이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 너한테 위로가 될지 몰라서 전화했어.
나는 너를 항상 생각하고 있어. 혹시 언제 시간 돼? 내가 너를 보러 가고 싶은데 언제가 좋아?
아직 준비가 안됬으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해도 돼, 우리는 오랫동안 볼 사이니까 네가 괜찮아졌을 때 만나면 돼."
내가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서 꼭 말해줘."라는 말이었는데,
아무리 옆에 누가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도 막상 그 상황 되면은 옆에 있어달라고 물어보기 힘들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차라리 그냥 "네가 보고 싶고, 가서 옆에 있으면서 위로해주고 싶은데 혹시 언제 시간 돼?"
라고 물어보자.
배려한다고 사별자가 날짜와 시간을 정하게 하지 말고, 미리 정해서 물어보자.
"이 날 나 시간 괜찮은데 너 시간 돼?"라고 물어보자.
사별자는 슬픔으로 자책감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누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막상 약속을 잡고 할 정신이 없다.
사별자에게는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이날 되냐고 묻는 게 더 도움이 된다.
물어본 날이 만약 안되면 사별자는 "그날 말고 이 날 와줬으면 좋겠어."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시간이 되면, 그날 가서 옆에서 시간을 보내주면 된다.
시간이 되지 않으면 되는 날에 다시 맞추면 된다.
절대 사별자가 먼저 약속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말자.
그들은 그렇게 할 정신이 없으니까.
그냥 먼저 전화해서 먼저 약속을 잡고 옆에 찾아가서 있어주는 것이다.
사별자가 먼저 연락 안 해도 찾아가서 옆에 있어주고 안아주고 손을 잡고 토닥여주고 사별자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어떤 말로 위로하려고 해도 사별자에게는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것 아니고는 다른 말들은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자.
나는 어떠한 말보다 나를 위한 행동이 더 위로가 되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가서 옆에 있어주고 사별자가 필요한 것을 알아서 해주면 최고지만,
도움을 주고 싶은데 도저히 무엇을 해줄지 모르겠을 때는 물어봐도 괜찮다.
대부분 사별자들은 괜찮아 고마워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럴 때는 계속 물어봐라.
사실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나는 나조차도 내가 어떤 것이 내게 도움이 되는지 조차 몰랐고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본인도 모른다.
사별자들은 머리가 멍하고 무감각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의지조차 없으니까.
케니가 직접 내게 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나를 위로하고 도와줄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 질문을 받으면 솔직하게 '당신이 내게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묻지 말아 줘.'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고마워 알겠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별자들은 그들이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집 관련 일들은 항상 케니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퇴원 후 집에서 지내는 동안, 커튼이 갑자기 떨어져서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 난감했던 때가 떠올랐다.
커튼을 다시 달아달라는 부탁으로 친구가 부담을 느끼고 나를 보러 오는 것을 꺼릴까 봐 걱정을 했었다.
나는 도움이 필요했지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도움이 필요하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친구가 계속 물어본다면 사별자들은 '아 이 친구가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서 계속 묻는구나.'라고 받아들여서 하나씩 부탁할 것이다.
사별자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괜찮은 것처럼 대화한다고 해서 괜찮다고 절대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워서 그때만 괜찮은 척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또 잃을까 봐, 친구들이 내 곁에 남아있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내 감정을 표현하면 나를 보러 와준 방문자들이 불편함을 느낄까 봐, 다시는 나를 보러 오지 않을까 봐 괜찮은 척했던 적도 있었다.
사별자가 괜찮다고 하는 말은 절대로 괜찮은 게 아니다. 당신을 잃고 싶지 않은 두려움 때문에 그때만 괜찮다고 혼신을 다해 연기를 할 뿐이다.
사별자를 봤을 때 괜찮아 보이는 순간이 언제든 안 괜찮고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감정기복이 심한 사별자를 대하는 게 어색하고 힘들어서, 사별자에게 말로 상처를 줄까 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사별자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때는 사별자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감정기복이 심했던 나를 이해해 주고 곁에서 지켜주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위로였다.
내가 친구나 지인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내가 그들에게 소중한 존재이고 앞으로도 혼자 남겨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네가 사람들이랑 소통할 준비가 안됬을까 봐, 너 상태를 잘 몰라서 혹시나 해서 연락을 못했어.'라는 변명 따위는 하지 말아라.
사별한 친구에게 전화나 문자를 통해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사별한 친구는 약속을 잡을 정신이 없으므로 직접 찾아가거나 매일 집에 있는 사별자에게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집 근처 밖에서 만나는 약속을 잡아도 좋다.
혼자서는 밖으로 거의 나갈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자신의 상황이 집에 초대할 수 있는 상황이면 망설이지 말고 집에 초대하자.
사별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고 싶음에도 폐를 끼칠까 봐 집에 가도 되는지 물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것도 좋다.
내가 만약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이나 부인을 잃는다면, 내게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생각을 하면 좀 더 어떻게 행동할지 보인다.
나는 사고 후유증과 트라우마가 더해져 사별을 함께 겪고 있었기에 퇴원 후에 생필품을 사러 가고 장을 보러 같이 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부탁을 하고 싶어도 방해될까 봐 할 수 없었다.
같이 가기로 해놓고 약속이 취소된 경우가 있었기에 더더욱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케니가 더 보고 싶었고, 슬펐고, 죄책감도 커졌다.
그 친구는 내게 오지 못했었던 상황을 설명한다. '그래 그들도 그들만의 사정이 있겠지 나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살 수 없으니까. 그냥 바라지 말자. 나 스스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자.'
라고 생각했지만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서운한 게 쌓이면 그 관계는 힘들어질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그냥 이 친구와는 관계가 이 정도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케니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갔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친구는 케니를 잃은 것은 슬프지만 혼자 있으면서 나 자신을 알아가는 기회라고 내게 말했었다.
내가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해보라고, 새로운 인생의 막이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얘기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슬프고 우울함에 빠진 사별자를 긍정적으로 상황을 돌리려고 애를 쓰려고 하는 마음은 좋다.
하지만 내게는 이 말들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인생의 막이 열린다고? 우주 한복판에 나 혼자 덩그러니 길을 잃은 내게 새로운 기회가 온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 필요 없고 케니만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나의 힘듦을 이겨낼 수 없어.'
사별자에게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꾸준하게 알려주자.
하늘나라로 간 사람의 아내 혹은 남편으로서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사람으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음을 알려주자.
사별자들은 감정이 요동치기 때문에 괜찮은 날도 있고 우울에 빠져 힘들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날도 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을 봐도 괜찮은 날이 있고 다른 사람과 얘기할 힘도 없어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이 있다.
사별자가 마음이 왔다 갔다 하더라도 이해해 주자.
그들은 극심한 슬픔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당신의 부탁을 그들이 거절해도 거절을 받아들이고 다음에 약속을 다시 잡도록 하는 것이 좋다.
사별자가 평소에 좋아했던 음식을 가져와서 냉장고에 놔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사별자는 기력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가끔은 먹는 것도 잊어버려 끼니를 거를 때가 많다.
친구가 냉장고에 내가 먹을 수 있도록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됐었다.
엄마가 한국에 돌아가고 나 혼자 토론토에 남았을 때 이전보다 더 큰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왔었다.
혼자 남겨졌다는 두려움과 이 세상에 내 편이 없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고 이 전과 전혀 다른 삶에 혼란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혼자 멍하니 있다가 보면은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가는 것을 보고 바쁘게 살아왔던 과거가 허망하게 느껴졌었다.
공허함과 상실감에서 오는 우울에 빠져 있는 이 느낌이 싫었다.
우울과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그만 고통을 잊고 싶었다.
먹어서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종일 굶었던 위가 내 생각에 대답을 하듯 먹을 것을 달라고 꼬르륵거렸다.
밖은 이미 깜깜해졌고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친구가 와서 놔두고 간 닭고기와 밥 그리고 반찬들이 보였다.
그릇에 대충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허겁지겁 음식을 삼켰다.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 슬픔을 잠시 잊는데 도움이 됐었다.
꼬르륵거렸던 내 위는 잠잠해졌다.
냉장고에 내가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놔두고 갔던 친구에게 감사했다.
사별자는 언제 배가 고플지 사실 예상할 수 없다.
규칙적인 생활이 무너져 뇌가 멍한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에 감각이 둔해진다.
그래서 음식을 먹으라고 강요는 하지 말되 "네가 먹고 싶을 때 챙겨서 먹으면 내 마음이 행복할 것 같아."라고 말해주며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 주면 사별자는 진심으로 고마워할 것이다.
사별자에게 어떤 것을 조언하거나 강요하지는 말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고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다른 힘든 부담을 주는 것은 위로는커녕 더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사별자가 힘들까 봐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고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사별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이 지금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전부여서 이 얘기가 아니면 할 얘기가 없는 상태였다.
친구 중에는 내가 고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힘이 들까 봐 고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를 슬픔에서 잊게 해주고 싶어서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한테 고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얘기를 하지 않으면 조금 덜 슬플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내게 가장 큰 일은 하늘나라로 간 그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그 얘기를 그냥 피하면 내가 덜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게 무슨 리액션을 원하는 걸까?
서운했다.
사별자가 고인에 관해 얘기할 수 있도록 마음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어때?라고만 물어봐주고 사별자가 대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사별자가 고인의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따스한 눈빛으로 가만히 기다려주자.
이야기를 하는데 끼어들거나 멈춰야 한다는 부담을 주면 사별자는 꺼내 놓아야 하는 감정을 다시 꽁꽁 마음속에 감춰버릴 것이다.
고인의 이야기를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묻고 사별자가 고인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사별자가 말하면서 눈물을 보이면 울게 놔둬야 한다.
사별자는 고인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얘기하는 것을 진심으로 원한다.
하늘나라로 갔다는 것을 알지만 나를 포함해 여러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기를 원한다.
내가 한 모든 이야기들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지극히 내가 경험했던 주관적인 일임을 고려해 줬으면 좋겠다.
사별자에게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를 때 도움이 되어 주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나의 경험들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할 때 위로의 말이 필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안아주고 보듬아주는 존재가 서로에게 되어 이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 남은 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세상으로 물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