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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Apr 26. 2022

아픔에 관하여

생각 하나. 매번 삶의 우산을 지참할 수는 없습니다


인과(因果)의 연결을 가끔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 이런 행복은 없었을 텐데…. 그때 그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아픔은 없었을 텐데…. 우리의 마음을 더욱 미소 짓게 또는 씁쓸하게 만드는 것은 그 결정적인 순간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꼭 그래야 할 숙명적인 이유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능력으로는 인과의 흐름 속에 일어나는 그 모든 세세한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기에, 우리들은 그저 수용하고 살아가면서 가끔 창밖을 바라봅니다.

 비가 내립니다. 무심코 집을 나섰다가 다시 우산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서고 그사이에 늘 타고 다니던 시간대의 버스는 떠나갑니다. 다음 버스 안에서 우연히 들려오는 라디오 속 누군가의 스쳐 가는 한마디가 어쩐지 내 마음에 깊숙이 담기고, 이것이 내 삶의 방향타가 되어 버립니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운명처럼 내 것이 되기 위해서 비가 내렸을까….


 알 수 없는 인과의 흐름이 좋은 열매를 맺어줄 때는 우리는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 되지만, 때로는 아니 훨씬 더 많은 경우에, 좋지 않은 결과를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리는 뜻하지 않은 비를 맞게 됩니다. 그저 일상을 적시는 가랑비일 때도 있지만, 가끔은 생애를 가누지 못하게 퍼붓는 폭우에 흠뻑 젖기도 합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떻게든 폭우를 피할 수 있었다고 가슴을 치지만, 이미 비는 먼 과거 속에서 내 온몸을 흠뻑 적시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끔히 갠 하늘 속으로 자취를 감쳐버렸습니다.


 언제 또 비가 내릴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매번 우산을 지참하고 다니지는 못할 것입니다.






생각 둘. 위로


그에게 감내할 수 없는 아픔을 묵인하신 이여

제가 대신할 수 없는 위로도 함께 내려주소서





생각 셋. 꿈이 꿈인지 모르듯 삶이 꿈인지도


장자의 제물론에는 유명한 ‘호접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언젠가 꿈에서 내가 나비가 되어서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고, 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틀림없는 ‘나’라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대체 사람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사람인 나로 변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꿈을 꾸는 동안에 그 꿈이 너무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서 생각해보면 너무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을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꿈을 꾸는 동안 어째서 이것이 말도 안 되는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 삶도 그렇게 긴 꿈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이 모습이 ‘실재’가 아니라고는 도무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마치 꿈을 꿀 때 그것이 ‘실재’로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지우고 싶지만,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도 사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꿈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그런 상상은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긴 꿈에서 깨면,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사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음에 기뻐할 것이고, 사무치게 그립지만 볼 수 없는 사람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면 말할 수 없이 허전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안도의 미소를 지을 것도 같습니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일생은 몇 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어쩌면 긴 꿈이라는 생각마저도 그저 우리의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 넷. 연기


피어나는 연기를 본 적이 있는가

서서히 흘러 희미해진 잔상을 본 적이 있는가

가슴 속에 갇힌 듯한 시름이 지금 그대에게 있는가





생각 다섯기적과 기정사실     

 

기적 같은 희망, 기정사실 같은 체념, 그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품으면 마치 약을 복용한 것처럼 반짝 힘이 나지만, 그 희망마저 덧없이 떠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약효가 사라져 더 힘든 몸처럼 되어버립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체념하면, 왠지 마음은 조금 편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는다는 것이 마치 공허한 세상에 덩그렇게 놓인 기분이 들게 합니다. 그리하여 어느 한쪽에 가만히 있으면 힘들어지는 마음은 마치 뜨겁고 차가운 돌을 번갈아 밟으며 각각의 고통을 모면하는 것처럼, 기적 같은 희망과 기정사실 같은 체념의 이쪽저쪽을 오고 갑니다.       


         



생각 여섯  

        

희망은, 희망 속에서도 자랄 수 있고, 절망 속에서도 피어날 수 있습니다.

희망 속에서의 희망은 마치 화창한 아침에 내리는 또 하나의 빛처럼

밝음 속에 희미합니다.     


절망 속에서의 희망은 마치 칠흑을 가르는 한줄기 섬광처럼

어둠 속에 선명합니다.          





생각 일곱그늘     


커튼을 여니 밝은 햇빛이 실내로 들어옵니다. 뒤돌아보면 커튼을 열기 전에는 몰랐던 먼지가 빛 속에서 아른거립니다.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늘이 진다고 해서 그 먼지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으면 일단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너무 밝은 삶 속에서는 우리가 맞닿아 뜨리고 싶지 않은 것들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권태일 수도, 때로는 침울일 수도 있습니다. 침울이 반드시 그늘 속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 우리 삶에 그늘이 드리워지면 처음에 그 그늘의 무게에 힘겨워하지만 이내 빛을 찾아 나서려는 힘이 생기고 그것은 권태와 침울을 모두 물리쳐 줍니다. 그늘 속에서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그늘도 때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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