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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Apr 26. 2022

멈춤

생각 하나. 겉모습에 대한 단상


 일행이 미국 출장을 갔습니다. 아침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한 명이 약속 시각이 넘었는데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뭔가 허탈하고 찜찜한 듯한 표정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각한 사정은 이렇습니다. 후배가 가게에서 치약을 사다 주어, 그 치약으로 양치질을 하는데 이상하게 입안이 뻑뻑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치약이 아니라, 틀니 접착제였다고 합니다. 제품 이름과 제품 설명을 자세히 읽지 않고, 포장에 이빨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둘 다 당연히 치약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빨 그림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런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작았을 것입니다. 


 얼핏 본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모습이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후배는 ‘익숙한 설정’으로 인해 착각하였고, 봉변을 당한 선배는 ‘전달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 간과하였을 것입니다. 표면과 다른 사물ㆍ현상ㆍ사람의 이면에 속았다고 생각하기 전에, 내가 제대로 표면을 차분히 읽었는지부터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멈추어 바라보아야 합니다.





생각 둘. 다시


미완성도 완성도

신발 끈을 동여맨다.

새 빛의 대지 위에서.





생각 셋. 묻힐뻔한 여권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임원, 부장과 함께 해외 출장을 갔었습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임원의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권을 분실하여 그걸 찾느라, 어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합니다. 전날 임원이 부장에게 혹시 자기 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냐고 했는데, 부장은 그런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임원이 출장 일정을 조정하고, 여권 분실 신고를 하러 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극적으로 여권을 찾았습니다. 여권을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부장이었습니다. 물론, 부장은 임원에게 무척 미안해했고, 임원은 다소 화가 났겠지만, 그래도 여권을 찾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걷히고 빛이 차오를 때 오히려 기운이 나는 것처럼, 그 임원은 출장 기간 내내 활동적이었고, 부장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부장은 여권이 본인에게 있음을 안 순간, 어떻게 처리할지 전전긍긍하다가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스갯소리로 여권을 땅에 묻을까 말까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미 땅을 조금 팠다고 했습니다. 이실직고하고 나니, 임원의 반응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그 후의 일정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둘은 오랜 세월 재밌는 에피소드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대인관계에서 잘못을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인정하고 나면 상대방이 의외로 열린 마음으로 화답하고 이후 관계가 오히려 호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인관계뿐 아니라 ‘나의 길’ 찾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추진하는 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못 가고 있는 일을 돌려세우는 힘입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도모하는 것이 지금까지 해오던 바를 멈추는 것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새롭게 추진하기보다 하던 일을 멈추기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렵지만 일단 멈출 수만 있다면, 새로운 일은 힘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펼쳐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고, 내가 가야 할 길은 저기 있는 것을 알고도 길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은, 새로운 길이 내게 보내는 두려움보다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길에서 벗어나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는 용기와 지혜에 앞서, 멈추는 용기와 지혜를 생각해 봅니다. 


 나아가기 위해 멈추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생각 넷. 겨울 길에서


언 길은

나를 돌아보게 하고,

길 위의 햇빛은

그대를 돌아보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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