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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Apr 26. 2022

자유

생각 하나. 자유 - 완전해야 하면서도 속박당해야 하는 


- 완전해야 하는 자유


 천지 만물의 주관자께서는 그 전지전능한 힘으로 이 세상의 악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태초와 같은 평화로운 세상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 것입니다. 

가끔 어리석은 의문을 가져봅니다. 왜 신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신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의 피조물인 사람에게 고귀한 자유를 온전하게 부여하는 순간, 이 세상에 악이 들어서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악한 생각에 대한 자유만은 억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온전한 자유가 아닙니다. 신은 인간을 그의 종속물이 아닌 주체적인 개체로 지으셨습니다. 

 자유, 그것은 비극적인 혼돈, 그리고 끝없는 시련과 맞바꿀 만큼 고귀한 것인가 봅니다.


- 속박당해야 하는 자유


 칸트는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음에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자제력에서 나온다는 뜻으로도 이해합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바로 이러한 자율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에 구속된 존재가 아니라, ‘자율’을 가진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다면, 역설적으로, - 그것이 사회의 보편적인 규범이든, 자신이 세운 가치관이든 - 자신을 무언가에 속박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생각 둘. 우리의 소원


 눈을 감고 북녘의 산하를 그려봅니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흐린 산수화, 거기엔 왠지 나무들마저 성깁니다.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 와도 메마른 나뭇가지만 보이고, 새소리조차 어쩐지 처연하게 내려앉습니다. 사람이 그어 놓은 선을 사이에 두고 강산마저 바뀌었는가. 그토록 짙은 편견이 자연마저 덧칠하나 봅니다.


 수년 전 평양 어린이예술단이 내한하여 우리 어린이들과 함께 합창했던 장면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가슴 속 잠겨있던 하나 된 조국을 불러내는 아련한 노래…. 북녘의 아이들은 한가득한 표정으로 저 깊은 곳에서 한 소절씩 꺼내어 부르고 있었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이 정성 다해서 통일을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라 부를 뿐. 어찌 된 일인가 나의 목줄기는 분화구로 이어진 화도(火道)가 되었습니다. 훈련된 노래지만 어쩐지 진심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 진심은 마디마디 울렸습니다. 어느덧 손을 맞잡고 일어선 관중석 노련한 어른들 후렴도 지각이 균열하듯 울려 나갔습니다. 짙은 화장이 동안을 덮고 영문도 모르게 그 목소리 철들었어도 어린 눈동자는 이렇게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자유, 꿈에도 소원은 자유….


 내 주변의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던 그 아이들의 천진스런 표정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북녘의 산하를 그려봅니다. 흐린 덧그림을 거둬내니 푸르름이 울창합니다. 나뭇가지에 초록 잎새가 가득하고, 새들의 합창은 산세를 타고 먼 곳까지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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