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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Apr 26. 2022

어머니의 별들

생각 하나. 만세 절벽


바닥이 훤히 비칠 듯 투명한 사이판 바다

직각의 절벽 저 아래

유난히 짙푸른 바다가 흐르지도 않습니다. 


관광객들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정겨운 사진을 남깁니다.

그 절벽 끄트머리에 서 보았습니다. 

발을 헛디딘 것처럼 불현듯 중심이 흔들립니다.


수십 년 전, 그 나라의 병사들은 마지막 만세를 외치며 

그래도 자신을 위로했는지도 모릅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해구 앞에서

그 외침 하나 붙들고 바다의 내면을 모른 척 했습니다.


낭떠러지에 선

어리고 순결한 또 한 무리의 청년들

어머니가 계신, 

헤아릴 수 없이 멀어진 곳을 밤마다 그리워했을 청년들

그들에겐 마지막에도

그런 마취약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직각의 절벽 저 아래

속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흐르지도 않습니다.




[만세 절벽]

사이판 북쪽 끝에 위치한 곶으로, 1944년 사이판 전쟁에서 미군에게 밀린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이 그들의 왕과 국가에 대한 만세를 외치며 바다에 뛰어든 곳으로, 여기에는 강제로 끌려온 어린 한국 청년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생각 둘. 그날의 DMZ


 어린 시절 십자가는 그에게 원수마저 해하지 말라는 거역할 수 없는 옥조를 내려주셨습니다. 먹구름 아래 꽃잎이 흔들립니다. 비가 내리고 어느새 붉은 꽃물 번져가면 그는 늘 간직해온 십자가를 떨구고 함부로 된 사람으로 탈바꿈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살 내음 연기가 수척해진 양심에 와 닿으면 바닥에 널브러진 꽃잎을 추스르고 시들어버린 제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비 그친 전선의 밤 흩날리던 꽃잎 같은 굽이진 철책의 불빛이 병사의 신앙처럼 외줄을 탑니다.     


 아침 순찰을 나선 분대의 행렬을 반기듯 방책선을 따라 늘어선 돌계단에 새봄이 한 걸음씩 내려앉습니다. 푸른 뜰에서 잠시 설레는 사향노루의 눈동자에 이내 굵은 격자무늬가 그어집니다. 반복되는 하루의 순환에 일찍이 적응해 버린 이곳에서 촌각이면 무너질 고요는 수십 년간 관성으로 버티어왔습니다. 저물녘 투광등 빛이 저만치 팔을 뻗고 앳된 초병의 눈길이 주황색 환영을 잠시 보았다가 시간이 흘러도 친숙해지지 않는 어둠 위에 놓인 평화를 조용히 관통합니다.


 눈을 감으매 어느 날인가 꽃잎의 전설도 초병의 모습도 자취를 감춘 그곳에 사향노루는 이곳저곳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티없는 눈망울을 높이 들며, 저 멀리까지도 잘리지 않은 어느 트인 아침을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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