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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Apr 26. 2022

분노에 관하여

생각 하나. 분노의 신호


용서는

그대와 나 사이

모닥불 같은 것

서로가 따뜻해지네



 <단테의 신곡>은 주인공 단테가 살아있는 몸으로 지옥과 천국, 그리고 그 중간단계인 연옥을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단테는 살인과 같이 우리사회에서 매우 중한 범죄로 취급하는 죄뿐만 아니라, 시기, 분노 등도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영혼들이 지은 죄의 유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타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화가 나는 것 자체를 죄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분노는 보통 증오의 감정을 동반하게 되고, 증오는 증오의 대상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므로 죄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끄럽지만, 아주 짧은 순간일지언정 분노를 유발한 사람에 대한 저주 섞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분노에는, 정당하고 필요한 분노, 병적인 분노, 자제력 부족에 따른 불필요한 분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분노는 논외로 하고, 세 번째 분노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분노의 감정이 끓어오르는 그 순간 그것을 상대방에게 비이성적으로 터뜨리고 나면, 한동안은 너무나 당연히 상대방에게 합당한 행동을 취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그 상황을 객관적인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상대방의 언행을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한 부분 이해하게 되며, 그 상황에서 자신이 대처한 반응이 지나쳤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노라는 감정을 이제부터는 잠깐 ‘생각을 중단’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머지않아 분노의 감정이 걷히고 훨씬 더 세련된 대처를 하는 자신을, 아니 때로는 아무런 대처도 필요 없음을 느끼고 싱겁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임스 글릭의 저서 

<카오스>를 보면, ‘소용돌이는 항상 순조로운 흐름과 섞여 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간의 관계도 자연계의 현상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마치 파동 그래프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늘 변화하고, 가끔 그래프가 커다란 진폭으로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뒤돌아보면 그저 일시적인 이탈점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불의인 경우가 아니라면, 논리적으로 용서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보다 어렵지만 무조건 용서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실 무조건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는, 용서할 만한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각 둘. 생각의 방향 


 마음은 참 이상합니다. 어떤 때는 누군가에게 증오를 느끼다가도, 또 어떤 때는 그 사람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생각이 잠시 내게 멈추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잘못된 언행을 생각하니 증오의 시간이 되고, 내가 상대방에게 행한 잘못된 언행을 생각하니 연민의 시간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에게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 잘못을 어느 방향으로 먼저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 셋.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생기는 이유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생기는 이유는 내가 타인에게 지은 잘못을 용서받는 기회를 얻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가 지은 잘못은 나에 대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다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굳이 고맙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적어도 미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지은 잘못을 용서받을 기회를 주었으니까. 물론,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러도 뉘우치기만 하면 된다면, 잘못에 대해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저지르고 나서 뉘우치면 그만이라고 무의식이 속삭일 수 있습니다. 나의 잘못은 누군가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기에, 용서를 받으려면, 누군가가 나에게 저지른 잘못을 고통스럽지만 나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개념은 그래서 공평해 보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생각 넷. 법칙 적용자 v. 성찰기회 제공자


 강원도의 어느 사찰에서는 스님들이 방생한 물고기가 멀리 가지 않고 한곳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스님들이 가두리양식장을 운영하는 것으로 오해받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려니 할 것이고, 혹자는 정말로 그렇게 오해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어떤 집단에서든 대략 열의 아홉은 나를 이해하고 지지하고 신뢰해도 그중의 한 명은 이상하게도 나를 오해하고 왜곡합니다. 편의상 이를 '9대1의 법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열의 한 명에 속하는 사람 중에는 그야말로 이유 없이(또는 의도적으로) 나를 오해하고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는 나도 모르게 내가 그들을 서운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그냥 법칙을 적용해주는 사람이라고 편하게 간주하면 되겠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언행을 상식의 기준으로 분별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극단적인 인식의 틀을 적용하여 왜곡하거나 특히 어떤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나를 왜곡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어떤 진실한 해명도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오해하고 왜곡한다면 그가 법칙 적용자인지 성찰 기회 제공자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아울러 내가 누군가에게 혹시 법칙 적용자로 간주되지는 않을지 한 번쯤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생각 다섯. 두 가지 작은 불의


 제가 생각하는 근사한 사람은 작은 일에도 분노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도 잊지 않고 분노함으로써 더 큰 혼돈을 막고 평온을 지켜내는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근사한 사람은 때로는 작은 일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 분노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어서 그 자체로써 평온을 지켜내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타인에 대한 작은 불의이고, 후자는 자신에 대한 작은 불의입니다. 전자의 분노가 불의를 저지른 자에 대한 미움에서 비롯되지 않았을 것이고, 후자의 인내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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