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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계인총각 Apr 13. 2022

tree_4. 안녕, 할아버지

"이제 할아버지를 볼 수 없는 거야?"

아들이 사랑하는 외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들은 내내 울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고, 아들은 외할아버지에게 손자이자 아들이었다. 친할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다. 아들에게 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가 전부였다. 그래서 '외'자를 빼고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정말 단짝이었다.


장인어른은 본인의 아들을 가슴에 품고 사셨다. 아내의 오빠가 이 땅에 머문 시간은 1년 남짓. 지금은 하늘에서 살고 있다. 장인어른은 아들이 그리울 때마다 술을 드셨고, 장모님은 지금도 악몽을 꾸신다. 추운 겨울, 장인어른은 40년 만에 아들을 만나러 하늘로 떠났다. 하늘에선 두 분 다 아프지 않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아빠만 고생하면 모두가 행복했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는 아기가 태어날 때쯤 장인어른 댁 근처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어마 마앙~~.' 아기는 엄마의 배에서 나오자마자 엄마를 부르짖는 듯한 울음소리로 우리를 맞았다. 아들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말 문이 트일 때쯤 할아버지를 '하하', 외할머니를 '헤헤'라고 불렀다. 엄마, 아빠만큼 자주 불렀다. 두 분은 아들처럼 손자를 키웠다.

아들은 특히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할아버지도 손자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다. 아들이 인생에서 맞이하는 '처음'의 절반은 할아버지와 함께 했다. 처음 문화센터에 갈 때도 할아버지가 데려갔고, 처음 어린이집에 갈 때도 할아버지와 함께 갔다. 또래 엄마들에게 소문날 정도로 두 사람은 단짝이었다.


아들이 영화관에서 팝콘 먹고 있는 사진을 보면 장인어른이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유치원을 마치고 돌아온 손자를 데리고 종종 영화 보러 다니셨다. 장인어른은 상영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출출한 손자에게 팝콘을 사주시곤 했는데, 그 지극히 평범한 손자의 모습을 휴대전화 사진에 담으셨다. 사진에는 아들만 있는데 이 사진만 보면 늘 장인어른이 생각난다.


일요일에는 집에 있는 손자를 불러내 목욕탕에 데려갔다. 아들은 식혜를 좋아하는데, 특히 할아버지가 목욕탕에서 사주는 식혜가 제일 맛있단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떼를 쓰면 연로한 몸에도 야구를 했고, 아빠가 사주지 않는 장난감을 사주고, 철마다 새 옷도 입혔다. TV 리모컨을 놓고 다투는 모습은 영락없는 친구다. 장인어른은 아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들을 더 아프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손자와 하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장인어른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맏사위로서 장인어른에게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아들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표를 구해 장인어른과 단 둘이 야구장에 갔다. 야구를 좋아하는 장인어른은 처음으로 한국시리즈를 직접 관람하셨다. 비바람이 부는 궂은 날씨에도 우리는 사진을 남겼다.


골프를 배우고 함께 다. 골프는 연로한 장인어른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었다. 1년에 2~3차례 라운딩을 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유독 장인어른 앞에만 서면 정말 못 쳤다. '올해 열심히 연습해서 내년에는 정규홀에 모셔야겠다.' 장인어른을 모실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게 해 주셔서 다행이야."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손자를 사랑하셨다. 지병이 악화된 할아버지는 입원한 지 딱 한 달 만에, 손자가 여덟 번째 맞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돌아가셨다. 크리스마스를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뜻이다. 크리스마스는 아들이 가장 좋아하고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다. 종교가 있는 아들은 할아버지가 천국에 갔다고 확신하고 있다. 아들은 학교 친구들에게 "눈싸움을 하면서 노느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줄도 몰랐다"라고 했단다. 펑펑 울었던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태연한 척한 아들을 보니 더 슬펐다.


나는 장인어른의 지병을 안일하게 여겼다. 몸이 안 좋아진 부위만 치료받으면 툴툴 털고 일어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입원 전까지 아무런 불편함 없이 외식하고 산책하고 운전도 손수 하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병원에서 꾸준히 치료받으셨다. 옆에서 간호하는 장모님의 불안감에도, 나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장인어른의 병환에 유독 긍정적이었고 곧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내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장인어른이 퇴원하면 타실 수 있게 차를 점검받고 깨끗하게 손세차도 해놨었다.  근거 없는 확신들은 죄책감으로 남았다.


장인어른은 아내와 나의 마지막 아버지였다. 이 세상에 아버지가 없다는 게 바다 한 중간에서 밤바다를 바라보는 느낌일까. "할아버지가 돌아섰다는 게 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손자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할아버지를, 장인어른을 볼 수 없다니... 아빠로서, 사위로서, 아들로서 겪어야 하는 가장 큰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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