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로 살 용기
작년 가을부터 갑작스레 암투병이 시작되었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사는 곳도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족들과도 떨어져 혼자만의 투병을 시작했다. 내 인생의 시계는 잠시 멈췄다. 상황들을 둘러보고 이성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만큼의 정신적, 육체적 체력도 없었다. 그저 치유에 집중해야 했다.
3주 주기로 투여되는 항암이 시작되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2주 정도, 나머지 한 주는 그나마 제정신이다. 아파 누워있다가도 조금 정신이 차려지면 그 틈을 타고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일하는 것도 습관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런 암투병 시간마저 낯설었다.
그러다 문득, 해보고 싶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동안 바빠서 미루었던 전자책 쓰기. 미국에 살면서 내 사업으로 해외 역직구 온라인 사이트(일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가르쳐 달라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 참에 이걸 정리해서 전자책으로 내봐야겠다고 결심.
항암제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뇌에도 영향을 끼치는지 밤을 새운 것처럼 항상 머리가 멍하다. 기억력도 상당히 감퇴되어 집 앞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현관 번호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지금도 모든 것이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지만 '그래도 살아있으니 감사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나를 위로한다.
제정신이 들 때마다 전자책을 쓰기 위해 노트와 컴퓨터를 꺼내 조금씩 큰 틀을 잡고, 목차를 정하고, 한 페이지씩 써내려 갔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 하면 나타나던 몬스터가 어김없이 나타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뭘 또 시작하는 거야? 잘 안 될 거야."
"요즘 전자책 한물갔어."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쉬어. 경쟁자가 얼마나 많은데."
"포기해. 그럼 훨씬 편해져."
두려움의 몬스터가 나타날 때, 그 목소리에 집중해 결국 포기한 일도 있고, 우울감에 빠진 적도 있다. 두려움에 눌려 포기해 버리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영락없이 '후회'라는 감정만 남았다. 몬스터가 거리를 두고 조금 멀어지면 내 안의 열망은 다시 꿈틀댔다. 그렇게 몬스터에게 수십 번 속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새로운 시도에는 두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그게 바로 두려움의 몬스터라는 것을.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보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나에게는 몬스터를 대적해야 하는 날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내 추측). 어떤 날은 몬스터 대거 출동!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괴롭히고 떠날 때도 있다. 처음 겪는 일은 두려움이 크지만 이것도 자주 겪다 보니 대담해지고 대처 능력 기술도 생겼다.
그러다 두려움을 주는 몬스터를 길들이는 3가지 방법을 터득했다.
첫 번째는 몬스터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몬스터의 캐릭터도 파악해 두면 다루기가 쉬워진다. 몬스터는 한결같이 부정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포기하도록 유도하며, 희망과 꿈과 열정을 싫어한다. 두려움을 주는 것이 몬스터의 역할이고 그것을 에너지로 삼아 활동한다.
"네가 뭘 하겠어."
"포기해."
"희망을 버려. 열심히 살지 마."
이제는 몬스터가 나타나면 '올 것이 왔구나'하면서 웃어넘기는 여유도 생겼다. 그가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성실함에 놀라기도 한다.
두려움 없는 인생은 없다. 그걸 무서워하고 회피하고 멀어지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거꾸로 평생 내 옆에서 동행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언제부턴가 몬스터를 분별하려고 색깔과 모양도 넣어 이미지를 만들었다. 픽사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에 나오는 푸른색 설리 몬스터처럼.
[몬스터 주식회사]는 코미디와 판타지 장르의 영화다. 인간 세계와 몬스터 세계가 연결된 문을 통해 인간 세계로 들어와 아이들을 놀라게 해 비명을 지르면 그 비명을 에너지로 활용한다. 어느 날 실수로 설리와 마이크가 '부(boo)'라는 인간 아이를 몬스터의 세계에 데려 오게 된다. 다시 부를 인간 세계로 무사히 돌려보내려는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고 할까? 몬스터 주식회사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가진 푸른 털과 거대한 몸짓을 가진 설리처럼 나의 몬스터도 거대한 몸짓과 핑크털을 가졌다. 두려움을 주는 것이 그의 일이지만 사람을 해치지는 못한다. 인간의 두려움을 에너지로 활용할 뿐. 이렇게 두려움의 실체를 캐릭터로 만드니 두려움이 그리 무섭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군. 두려움을 주려고 나타났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뿐이야. 그래야 행복하다고."
이젠 나도 몬스터를 다루는 내공이 쌓이고 경력도 만만치 않다. 두려움이란 결국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그 크기를 줄일 수 있다.
두 번째는 그냥 하는 것, 계획했던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몰려오면 매번 승리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다. 가끔은 무기력함이 길어지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커진다.
이런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미리 계획을 세우고 스케줄을 짜 두는 편이다. 이번에 전자책을 출판하면서도 막연하게 '언젠가'라든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면'이런 식으로 틀을 짜지 않는다. 인간은 자고로 쉬운 길이 있으면 그 길을 먼저 선택하는 습성이 있는데 나는 더더욱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자책 쓰는 기간: 8월 1일 ~8월 20일
전자책 수정 & 퇴고 기간: 8월 21일 ~ 8월 25일
전자책 출판기간: 8월 26일 ~ 8월 31일
스케줄이 지나치게 빡빡해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대략적으로 짜두면 실행하기가 조금 더 수월해진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네. 다행이다."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뭐라도 하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지고 두려움도 작아진다. 단 한 번만에 구름 떼처럼 몰려오는 두려움을 걷어내기는 어렵다. 하다 보면, 걷다 보면 그 구름 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비를 피하게 되는 날도 있다. 뭐라도 하면 좋은 에너지가 구름을 밀어내는 바람이 되기도 하고 햇빛이 되기도 한다. 그런 날들의 경험으로 나를 다독이며 '뭐라도' 성실히 오늘의 할 일을 해나간다. 그러면 다시 두려움의 몬스터는 자취를 감춘다.
세 번째는 아침마다 좋은 에너지를 충전한다. 나는 완전한 아침형 인간은 아니다. 아침에 잠이 많지만 7시 전후로 일어나려 한다. 일어나 가벼운 맨손체조를 하고 황금시간에 돌입한다. 9시 반쯤 아침 식사를 하기 전까지 매일 2시간 정도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한다. 이 시간에 영감을 얻고 오늘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이 시간들이 축적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습관 중 하나다.
아프고 나서는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고통스러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래도 책은 읽었다. 희망을 먹고 싶어서, 용기를 얻고 싶어서다. 암투병의 시간 동안에는 암, 건강, 면역, 영양 등의 책을 읽은 것이 치료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평소 읽는 책의 분야는 의학서적들이 아니다. 다양하다. 자기 계발서, 철학, 문학, 에세이, 소설, 성경, 어학, 시 등.
책에서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성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현재 살아있는 최고의 실력자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어 흥분이 된다. 멘토로 삼고 싶은 저자를 발견하면 어느새 그 책은 하루종일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아니 몇 주, 몇 달, 몇 년까지도. 이렇게 내 방 안에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초대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음속에 안개처럼 퍼져있던 두려움은 사라지고 꿋꿋하고 강인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다. 그런 나를 자주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이 3가지 방법이 나에겐 두려움을 이기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몬스터를 알아보고,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하며, 내면을 강화해 갈 때 몬스터도 자신의 세계로 떠난다. 사람들을 겁줘서 얻는 두려움의 에너지를 더 이상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삶의 패턴과 습관이 있듯이 몬스터에게도 패턴과 습관이 있을 뿐이다. 팽팽하게 맞서는 그 시간을 넘어 포기하지 않으면 몬스터는 사라지고 '나'는 남는다. 나는 이미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출처: 픽사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
"나는 나의 두려움을 직면할 것입니다. 나는 두려움이 나를 덮고 나를 통과하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지나간 후에 나는 내면의 눈을 돌려 그 길을 볼 것입니다. 두려움이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나만이 남을 것입니다."
- 듄, 프랭크 허버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