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족 9주 차
독립한 지 10년 만에 돌연 캥거루족이 된 30대 자식입니다.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TV수신료 2,500원.
몇 년 전, 나는 무심코 살펴본 관리비 고지서에서 그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웬만한 OTT 서비스 뺨치는 금액이 나도 모르는 사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누구냐 넌?
TV수신료는 공영방송(KBS, MBC, EBS)의 발전을 위해 징수되는 요금이다. 나는 케이블 방송만 챙겨보는 시청자인데, 왜 공영방송 발전기금을 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콜센터에 문의했다.
“TV를 안 봐도 수신료를 내야 하나요?”
“네. 맞아요“
“혹시 TV연결이 되어있지 않더라도요?”
“네. 집 안에 TV가 있으면 내셔야 해요”
텔레비전이 존재하기만 해도 돈을 내야 한다는 황당한 답변. 이건 나라에서 삥을 뜯는 게 분명하다. 이 땅의 모든 세대주에게 청구되는 이 요금, 이제 보니 TV수신료가 아닌 ‘TV구독료’였다.
캥거루족이 되자 세대주에서 세대원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덕분에 모든 공과금에서 자유로워졌고, 자연스레 TV수신료와도 이별하게 됐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나에게는 ‘채널 선택권’이 사라졌다.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우리 아빠도 항상 뉴스를 챙겨본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해박한 것이 뭐가 문제랴. 하지만 앵커만 다르고 내용은 비슷한 뉴스를 매 시각 챙겨보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그건 곤혹스러웠다.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는 나에게는 특히.
“지금 몇 시야? 뉴스 좀 틀어봐”
아빠가 거실에 있으면 나는 자연스레 리모컨을 잡지 않는다. ‘뉴스 좀 그만 보면 안 돼?’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공짜로 텔레비전을 보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TV수신료 안에는 채널선택비용이 포함인가 보다.
혼자 살 때는 집에 돌아오면 TV부터 틀었다. 심신 안정을 위한 백색소음을 만들기 위해서다. 어떤 날은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텔레비전에 하루 종일 지배당하곤 했다. 거의 전업 시청자에 가까웠다. 모르는 드라마가 없었고, 안 챙겨본 예능이 없었다.
리모컨을 쥐는 게 어색해진 요즘은 쉴 때도 TV를 보지 않는다. 그렇게 애청하던 <나는 솔로>도 안 본 지 두 달이 넘었다. 기수별 출연자의 직업•나이•성격까지 술술 읊어대는 인간 챗GPT였지만, 이제는 시큰둥하다. 다른 예능들도 흥미가 사라진 건 마찬가지다.
내가 거실로 나오면, 엄마는 슬그머니 리모컨을 건넨다. 보고 싶은 방송을 틀어도 된다는 신호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채널을 조종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B급 감성의 예능 프로그램을 트로트, 홈쇼핑, 건강 프로그램에 특화된 엄마에게 보여준다? 보나 마나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게 뻔하다.
“아우 정신 사나워. 저게 재밌나?”
이제 방에서 태블릿 PC로 OTT를 보는 것이 편하다.
가끔은 그립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오롯이 TV와 내 웃음소리만 가득한 순간이. 빼앗긴 리모컨에도 봄은 오는가. 언젠가 다시 독립하게 되면 보란 듯이 TV는 꼭 큰 걸로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