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족 8주 차
독립한 지 10년 만에 돌연 캥거루족이 된 30대 자식입니다.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엄마가 다 해줄게”
내가 초등학생이 될 즈음, 엄마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 시절 흔치 않던 워킹맘. 그녀는 다른 엄마들처럼 살뜰히 챙겨주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나 보다. 이번 기회에 보상해 주겠다며, 엄마는 모든 집안일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했다. 정말 달콤한 제안이었다.
나는 어디까지 엄마에게 부탁하고, 또 어디서부터 내가 전담해야 하는 걸까. 기준을 세워야 했다. 선을 그어야 했다. 최소한의 양심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 집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신세를 지고 있는 거니까. 모든 걸 엄마에게 떠넘기면 안 된다. 암! 그렇고 말고.
전에도 말했듯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굳건한 생활양식이 만들어진다. 나에게도 나만의 공식이 있다. 멋지고 대단한 방식은 아니지만, 나름 10년이 넘는 자취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저비용•고효율 프로세스다. 이것을 처음 접하는 엄마는 많이 우왕좌왕했다.
간혹 나를 배려하는 엄마의 행동이 오히려 방해가 되곤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셔츠에 달린 단추를 채우지 않고 옷걸이에 걸어두는데, 이는 빠른 출근 준비를 위해서다. 그런데 깔끔한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옷에 달린 부속품들을 꼭꼭 잠가서 걸어두셨다. 급박한 아침에 단추가 빼곡히 채워진 옷을 보면 뒷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엄마의 마음만 받기로 했다. 정성을 거절하는 모양새라 죄송스럽긴 했지만, 오히려 엄마의 일거리가 줄어들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는 내심 서운해하는 것 같다. 내 말투가 좀 까칠했나?
내 몫은 최선을 다해서 해내겠다던 다짐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나는 슬금슬금 엄마의 손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올케어(All-Care) 서비스는 중독성이 엄청났다. 한 번 길들여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집사의 손놀림을 거절하던 고양이가 끝내 배를 보이며 온몸을 맡기듯, 나 또한 엄마의 집안일 기술에 무장해제되었다. 빨래, 설거지, 가습기 청소, 베개커버 교체, 비에 젖은 신발 건조 등. 캥거루족 데뷔 두 달 만에 모든 일은 엄마에게 전가되어 있었다.
심지어 엄마는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것들을 나서서 해주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뜻밖에 선물을 받았는데 거절은 하기 싫은 심보랄까. 나는 결국 마지막까지 지키려던, 민망하고 부끄러워하던, 이건 꼭 내가 해야 된다고 결심했던, 속옷 정리까지 엄마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내 살림을 꾸린 지 10년. 누군가가 이 영역을 대신하는 것은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예외였다. 그녀가 해주는 뽀송한 빨래에 스며든 섬유유연제 향기를 맡다 보면 어색한 기분도 스르르 녹아내린다.
역시 엄마의 올케어 서비스는 매우 위험하다. 훗날 2차 독립의 순간이 다가오면, 나는 아마 큰 후폭풍을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염치없지만 그녀의 손길을 만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