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은 100년이 지나면 사랑받는다는 고전 책들의 말을 믿었다. 그 뒤로 문제집들을 구박하지 않았다.
책들과 문제집들의 평화가 찾아왔다. 100년을 기다려야 하는 책들은 텃세를 그만 부리고 문제집들을 잘 대해 주었다. 가끔씩 말도 걸어 주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문제집 너네 밥은 잘 먹고 다녀? 혹시 굶으면서 저 집 아줌마한테 시달리는 거 아니야?" "우리가 시달리기는 해도 아줌마가 인정 없고 그러진 않아. 대접은 잘 받고 있어." "그나저나 저 집 첫째 아들 정신 차렸나 봐." "정말이야? 어쩌다 정신을 차렸대? 공부를 열심히 하긴 하는 것 같던데. 더 놀다 정신 차리지. 앞으로 더 놀기 힘들어질 텐데." "더 놀면 저 아줌마가 가만두겠어? 며칠 전에도 저 집 아들 아줌마한테 엄청 혼나던데. 그래도 머리 컸다고 아줌마한테 말대꾸를 다 하더라. 나중에 중2병 오면 어쩌려나 몰라." "어머머머, 그랬어?" "야, 신간 너는 이 집에 같이 있으면서 도대체 뭘 보고 듣는 거야? 너무 고상한 척하는 거 아니야? 너도 그래봤자 100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지금이야 인기 있지. 조금만 기다려봐. 그 인기 평생 가나." "칫, 평생 가는 애들도 많거든?"
"참, 요즘 아줌마 글 잘 안 쓰더라. 온갖 법석은 다 떨어 대더니. 하긴 이번에 오래가긴 했지." "매일 쓰던 글쓰기를 왜 안 한대? 이제 겨우 5개월 쓰고 그만둔다는 거야? 설마. 그건 좀 아니지. 못해도 1년은 써야지." "매일 양만 늘었지 질적으로 별로라나 뭐라나. 뭐 하여튼 글쓰기를 멈춘 것 같지는 않고, 책도 읽고 신문도 보고 하더라. 그래도 매일 쓰는 것만큼 못할 텐데. 안타깝네." "애들 방학이잖아. 하루 온종일 애들 시중들기도 바빠 보이기는 해. 먹고 치우면 또 차려야 하니. 저 아줌마 입버릇처럼 '오늘은 뭐 해 먹나' 매일 이러더라고. 자기는 누가 밥만 차려주면 다른 건 다 자신 있다고 하면서. 내 보기엔 다른 것도 영 소질 있어 보이진 않지만. "근데 쓰다만 소설들은 어떻게 한대? 그래도 궁금해 죽겠는데 뭐라도 빨리 쓰지 왜 안 써." "누가 알아주지 않으니 흥이 나겠어?" "언제는 저 아줌마 글 형편없어 못 읽겠다고 할 땐 언제고. 싸고돌아" "야, 글 형편없는 건 없는 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지."
"우리 문제집들은 요즘 너무 바빠. 설 대목인 것 같아." "참 내, 설 지난 지가 언젠데 대목을 찾냐?" "이 집 애들 요즘 공부 많이 해. 아줌마가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어야 하지만 3시간 정도 주인아줌마와 앉아서 잠자코 공부하더라. 우리 문제집들 좀 봐 봐. 다 너덜너덜하지." "어, 정말 그러네. 형광펜으로 줄도 그어져 있고 틀린 것보다 맞은 게 더 많고. 이야. 허풍은 아닌가 본데?" "그래서 아줌마가 너무 바빠 글을 못 쓰고 있는 거야. 공부를 주로 첫째만 많이 봐주긴 하지만."
"걱정이다. 걱정. 암만 그래도 우리 100년 된 책 읽히는 것보다 못할 텐데. 쯧쯧.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책 읽을 생각을 해야지. 문제집은. 무슨 문제집이야."
문제집들은 그 소리에 발끈했지만 고전들이 하는 얘기들이라 잠자코 들었다. 속으론 두고 보라지 하며 뽄대라도 보여 줄 기세지만 겨우 화해했는데 또 싸울 순 없어 담담한 마음을 가지려 애썼다.
"기가 막힌 답안이네. 그럼 그럼. 우리를 읽어야 공부든 뭐든 잘하지." 한술 더 떠 불쑥 만화책들이 끼어들었다. 그 소리에 일제히 모두 만화책들을 쳐다보았다.시선을 한눈에 받은 만화책들은 머쓱했는지 어물어물 딴짓을 하며 공손해졌다.
"야, 너네 요즘 살만 나겠다. 저번에 애들 아줌마한테 엄청 혼나고 똥뚜간에 너네 안 갖고 들어가던데." "말도 마세요. 요즘 좀 살맛 납니다. 사실 똥도 먹고 그럴까 봐 엄청 걱정했었거든요. 하하하." "에잇,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라고."
만화책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늘 싱글벙글이다. 사실 만화책을 읽는 사람들 얼굴도 싱글벙글이다.
주인아줌마 집에 있는 책들도 표정이 밝고 편안해 보였다. 글을 쓰고 있던 아줌마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책꽂이에서 책을 한 권 골라 읽기 시작했다. 책들은 일제히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