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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억 각색 30화

에필로그

내가 기억하는 과거, 타인이 기억하는 과거

by 낮은 속삭임

과거는 각자의 기억 속에서 다르게 기억된다. 오래전, 아마도 내가 취직하고 몇 년이 지났던 때였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와 함께 프랑스-스페인 여행을 가기로 약속하고 각자 항공권을 구입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친구가 연락 두절 상태. 나는 이미 항공권을 구입한 상태였고 친구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그 여행을 혼자 떠나기로 했고,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혼자 떠난 해외여행이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그때도 위험하긴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던 파리 동역에 혼자 도착했던 그때는 얼마나 불안했던지. 다행히 숙소와 연락이 빨리 되었고 금방 숙소 관계자 분이 데리러 나오셔서 별일은 없었다. 그 여행은 정말 즐겁게 무사히 끝났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 여행이 끝나고도 몇 년간 연락이 되지 않았었다. 시간이 얼마쯤 흐르고 그 친구와 연락이 닿았는데, 그때 왜 함께 가지 못했느냐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정말 예상외였다. 내가 그녀에게, 다른 동행이 생겨서 너와 함께 갈 수 없다고 통보했다 한다. 그런데 그녀의 기억은, 그보다 더 몇 년 전 내가 호텔 패키지로 떠났던 유럽여행이었고 그때 그녀에게도 사정이 있어서 함께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아, 이 역시도 내 기억이니 내 입장에서 각색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이번 여행과 그 여행을 같은 것으로 기억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에게 먼저 약속을 어긴 사람으로 기억되었고, 연락이 된 이후에도 잘못은 내게 있었던 것으로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다른 약속이라 했는데도 그녀는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뿐이었고 그리하여 그녀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때 느꼈다. 결국 동일한 과거라도 기억하는 사람에 따라 주관적으로, 혹은 선택적으로 각색되어 기억될 수밖에 없다고. 그리하여 나는 이 글의 제목을 '기억 각색'이라 정했다. 아마 나와 이 기억을 함께 한 사람들은 내 기억이 잘못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긴 어떤 기억은 너무 오래되어서 섬광처럼 탁 지나갈 뿐인데, 그것을 내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 보면 당연히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나와 과거를 함께 한 사람들이라면, 내 글이 오로지 나의 주관적 기억이었음을, 그리고 내가 마음대로 각색하였을지도 모를 것임을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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