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아이[무동(舞童, 18세기 경)]-김홍도
18세기 조선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의 <춤추는 아이[무동(舞童)](18세기 경)>. 원형으로 둘러앉은 악사들이 흥에 겨운 음악을 연주한다. 북 치는 남자의 표정은 음악에 취한 듯하고 그 옆의 장구 치는 남자는 아마도 흥에 겨워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지 싶다. 피리 부는 남자들의 볼에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것으로 보아 매우 빠르고 신명 나는 곡을 불고 있는 모양이다. 대금을 옆으로 들고 부는 남자 역시 신나는 곡을 열심히 부는지 입 모양에 힘이 들어있다. 등을 돌리고 해금을 켜는 남자도 이 흥겨운 음악을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로 연주하는 모양이다. 다만, 단원의 해학이 살아있는 그의 손 모양은 거꾸로 되어있지만. 향피리 둘, 젓대(대금), 해금, 장구, 북으로 구성되는 삼현육각(三絃六角)의 장단 아래, 이제 가장 역동적인 소년에게로 시선이 간다. 악사들은 흰옷이거나 엷은 회색, 청회색의 도포자락이었지만, 춤추는 아이는 녹색 옷자락을 날리며 팔을 추켜올리고 연신 움직이고 있다. 아이의 움직임에 옷자락의 펄럭임이 그대로 화가의 붓끝에서 살아나며, 들어 올린 발바닥 선과 중심을 잡은 고운 붉은 신의 발끝은 춤선의 경쾌함을 보여준다.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나풀나풀 흔들리는 옷자락과 몸에 두른 띠는 마치 그 움직임을 보는 듯 생동감이 넘치는데, 이 아이의 움직임은 실제 우리나라 무용의 춤사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악사들에 비해 선명하고 진하게 그려진 아이의 모습에서 그 역동성을 확연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전해진다.
단원(檀園) 김홍도의 출신 가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7, 8세 무렵 경기도 안산의 표암(豹菴) 강세황 선생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표암 선생과는 스승과 제자 관계에서 시작하여, 표암 선생의 추천으로 들어간 도화서에는 상사와 직원, 이후 예술적 동지에까지 이른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이미 궁중 화원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29세에는 영조 어진과 왕세손(훗날 정조)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 즉위 후 임금의 어진 제작에 참여하였고 이로 인해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연풍 현감에 임명되지만, 화원의 능력에 비해 행정능력은 떨어진 모양이었던지 충청위유사의 보고로 파직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후 그는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이때 산수, 화조, 인물화에서 명작을 쏟아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가 조선시대의 풍속을 그린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의 25점의 그림 중 하나이다. 서민들의 노동, 놀이, 남녀 사이에 오고 가는 은근한 감정 등 삶의 여러 모습들, 농업, 상업, 어업 등 일상에서의 노동부터 노동 후의 휴식, 서민들의 놀이와 고상한 취미생활이 모든 계층의 남녀노소에게서 표현되어 있는 이 화첩은 그 존재 자체가 사랑스러운 것이며, 이를 남긴 단원(檀園) 김홍도는 정말 위대한 화가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정보와 이미지는 네이버 검색을 참고하고 내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