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튀르키예-열

흐르는 시간만큼 유적도 빠르게 늙어가고

by 낮은 속삭임

오늘은 셀축에 다녀오는 날. 바스마네 역에서 출발하는 오전 8시 30분 기차를 타기 위해 조식을 빠르게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기차역은 걸어서 5분 거리. 처음 셀축에 갔을 때는 파묵칼레에서 버스를 타고 바로 셀축으로 가서 2박 정도 숙박했었다. 그래서 오히려 여유 있게 셀축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때는 이즈미르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이즈미르에서 숙박하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아마도 셀축을 여유 있게 돌아다니지는 못할 것 같다. 물론 작정하고 돌아다닌다면 쉬린제까지 다녀올 수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빠듯하게 다닐 필요는 없다.

바스마네 역에 도착해서 가방을 검색대에 통과시키고 기차를 기다린다. 어디서 어떤 기차를 타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차 시간이 다 되어가길래 플랫폼 주변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현지인들이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셀축 간다고 하니 1번 홈에 있는 기차를 타라고 여러 사람이 말했다.

내가 탈 차는 3호차였는데, 아무 생각 없이 세 번째 차량에 탑승했는데 3호차 표시가 없었다. 뭐지 하는 마음이 들어서 다시 내려 기차를 보았는데 내가 탄 것은 4호차였다. 진행방향에서 세 번째 차량이 3호차였고 차량을 확인한 후 차에 다시 올랐다. 그런데 똑같은 실수를 한 현지인 아줌마도 있었다. 4호차에서 만난 그 아줌마를 3호차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앉으니 기차가 천천히 출발한다. 셀축행 기차는 중간에 이즈미르 아드난 멘데레스 공항에 섰다. 아, 이즈미르에 도착했을 때 구글맵에서 공항에서 바스마네 역으로 가는 것이 두 정거장 걸린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가차였나 보다. 그렇다면 내일 이스탄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올 때도 바스마네 역에서 출발하는 이 기차를 타면 되는 것이군. 그래서 바로 튀르키예 철도앱을 열어서 내일 기차표를 예매했다. 기차는 천천히, 그리고 또 어떤 곳에서는 빠르게 셀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즈미르에서 셀축으로 가는 방법은 바스마네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이즈반을 타고 어딘가에서 환승하여 가는 방법이 있다. 셀축까지 이즈반이 다니기 때문이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시미트와 아이란을 판매하는 아저씨가 기차에 섰다. 마치 과거 우리나라의 홍익회 카트처럼.

시간쯤 후 기차는 셀축역에 도착했다. 셀축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역에 내리니 과거 유적이었던 듯한 기둥이 보였고, 그 기둥 위에는 황새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예전에 셀축에서 숙박할 때 숙소 꼭대기층이 기둥과 거의 같은 높이여서 내 방에서 황새 둥지를 바로 볼 수 있었는데, 혹시 이 기둥을 마주하고 있는 저 호텔이 그때 내가 묵었던 곳이었을까?

셀축에 오는 이유는 에페스 유적을 보러 가기 위해서이다. 이곳으로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탔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셀축 오토가르 쪽으로 갔더니 몇 명의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택시 탈 거냐고 묻는다. 버스를 타려 한다고 하니 오토가르가 아닌 버스 정류소 쪽으로 가라고 하신다. 아저씨들이 말한 방향으로 가니 작은 버스 정류소가 나왔다. 그곳에 서 있던 기사아저씨에게 '에페스?'하고 물으니 반대편에 가서 타라고 손짓을 하심. 그래서 육교를 건너 에페스행 버스를 타는 곳에 섰다. 날은 덥지만 에페스로 가는 사람들이 나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에페스 유적 북문에 내려준다. 나의 기억 속에는 유적 남문에서 내려 북문 쪽으로 걸어갔었는데 이제 버스는 북문으로 내려준다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내가 늦게 온 것도 아닌데 곳곳에 투어버스와 여러 차량들이 손님들을 계속해서 내려주고 있었다. 엄청나게 오른 튀르키예 물가는 입장료도 예외가 아니다. 입장료는 40유로, 우리 돈으로 65,000원에 달하는데 이것을 현지 리라 환율로 받는다.

블루투스 이어폰 한 세트를 받고 에페스 유적 설명 앱을 설치하여 유적에 입장했다. 소나무가 자라난 길을 따라, 오른쪽의 외진 길을 걸어가면 성모 마리아 교회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곳곳에 펼쳐진 유적이 여러 가지를 상상하게 만들어주었다.

켈수스 도서관 쪽으로 걷는데 주위가 소란스럽다. 현지인들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한 장면을 연기하는 모양이었다. 가벼운 검투사들의 전투도 보여주면서. 햇살은 따갑지만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에페스 유적지와 묘하게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유적지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반원형 대극장은 공사 중이라 출입금지. 예전엔 저곳에 들어가 계단 어딘가 자리 잡고 앉아 있으면, 누군가가 무대쯤에서 노래를 불러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기억도 있었다. 아마도 어떤 이탈리아 관광객이었는데 그분이 무대쯤에서 'O, Sole Mio'를 불러서 모두의 시선을 받고 그래서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크게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저곳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기둥들이 자리한 곳을 지나 널따란 아고라 유적을 지나면 에페스 유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켈수스 도서관을 만난다. 2세기 초반에 세워진 이 도서관은, 전성기 때는 약 12,000권의 두루마리 장서를 보관했다고 한다. 다시 보는 켈수스 도서관. 유적은 아무리 보존을 잘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오래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낡아버린, 사람들이 많아도 어딘가 쓸쓸한 듯한 느낌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북문 쪽에서 남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많은 이들이 남문 쪽에서 걸어온다. 투어팀들이 보통 남문 쪽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익숙한 우리말이 들려온다. 한국인 투어팀인 모양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사람들은 에페스 유적을 즐기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나만의 방식으로 이곳의 유적을 즐긴다.

남문까지 걸어갔다가 매점에서 파워에이드 하나를 사서 자리에 앉아 마시면서 잠시 쉬어가기.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매점 앞 그늘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매점 근처에는 에페스의 전체 모습을 담은 모형이 자리 잡고 있어서 남문에서 들어오는 이들은 꼭 이 모형을 살펴보고 간다. 나도 그렇게 모형을 살펴보고 다시 북문 쪽으로 향했다. 왔던 길을 되짚어가면서 유적들을 다시 한번 눈에 담고, 켈수스 도서관에 들어가 사진도 찍으면서 다시 만난 에페스를 가볍게 즐겨보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도 나만의 즐거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좋은 일이다.

북문으로 빠져나와 사람들 틈에 끼어들어 다시 버스를 탔다. 올 때와는 달리 운 좋게(?) 자리에 앉았다. 문을 열고 가는 버스라 에어컨은 절대 생각할 수 없었지만.

시내에 도착해서 찾아간 곳은 셀축 박물관. 이곳에는 다산의 상징이자 풍요의 상징인 가슴이 많이 달린 아르테미스 상, 코가 깨진 에로스상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과 출토품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 들어가는 즐거움을 그대로 전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천천히 박물관에서 유물들과 만나는 시간을 즐기기. 이번에는 코가 깨진 에로스 상을 제대로 관람했고, 박물관 샵에서 비싸지만 마음에 드는, 코가 깨진 에로스 상을 샀다.

박물관에 다녀온 후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은 마르게리타 피자를 주문했다. 튀르키예식 피데를 주문할까 하다가 가끔씩은 피데의 토핑이 너무 짜서 절반 이상을 남기는 경우가 있기에 가장 무난한 피자인 마르게리따로. 혼자 먹기에 적지도,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마르게리따 피자를 아주 맛있게 흡입했다. 맛집으로 추천된 곳답게 피자는 맛있었다.

피자를 먹고 아야술룩 언덕 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셀축 성이었지 싶다. 원래 거기에 가려던 것이 아니라 아르테미스 신전에 가려던 것이었다. 기둥밖에 남아있지 않은 아르테미스 신전, 그리고 이사베이 자미와 같은 곳으로 가보려 했는데, 셀축 성에 이끌렸다. 들어가 보니 이곳은 사도 요한의 교회가 있었던 곳이고 그때에도 왔었던 곳이었다. 이만큼 입장료가 비싸지 않았기에 더없이 편하게 다닐 수 있었던 곳. 우연히 이곳에서 퇴직하고 여행 다니신다는 초로의 부부를 만났다. 가볍게 얘기를 나누고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셀축에 계시면서 에페스에 안 다녀오셨다고 하시는데, 내일 오후에 셀축을 떠날 예정이라 하셨다. 그래서 내일 오전에 에페스에 다녀오시면 좋겠다고 추천드리고 헤어졌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이즈미르로 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차 한잔 마실 틈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구글맵을 열심히 검색하여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 하지만 더워서 결국 선택한 것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을 가지고 테라스 석에 앉아 셀축에서의 한가로운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기차 시간이 다 되어 기차역의 플랫폼으로 왔는데 아침에 나와 함께 기차를 탔던 아줌마를 다시 만났다. 셀축의 아들 내외를 만나러 왔었다나. 며느리가 독일 출신이었는데 영어를 할 수 있어서 그녀가 아줌마와 나의 소통을 도와주었다. 아줌마도 이즈미르로 돌아가는 기차여서 그분이 타는 시간에 함께 타면 되는 것이었다. 기차는 약 삼십 여분 늦게 도착했고 이즈미르에 도착하니 거의 밤 8시가 다 되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피곤했던, 그러나 여유롭고 즐거웠던 셀축에서의 하루가 즐거웠던 날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리 많이 쏘다니지는 않았지만. 내일은 이스탄불로 돌아간다. 이스탄불 공항이 아니라 사비하 괵첸 공항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또 새로운 곳을 가는 기분일 것 같다. 이제 며칠 안 남은 튀르키예 여행이 문득 아쉽게 느껴진다.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여행이니까. 오늘은 일단 쉬고 내일 아침에 짐을 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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