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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Oct 13. 2023

어쩌면 상상일지도 모른다 - <질투>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84번.


  

   '질투'라는 감정에 갇혀버린 한 남자의 자폐적인 중얼거림과 고통스러운 관찰을 표현해낸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에는 인물의 심리묘사나 상징, 은유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시선은 카메라 렌즈로 보듯 고집스러울 정도로 사물의 표면에만 머뭅니다. 다음은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의 말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의 소설에서 과학적이고 상세하게 묘사된 많은 사물을 발견하게 될 경우에도, 거기에는 언제나 그리고 우선적으로 그 사물을 보고 있는 '시선'이 있다."



   << 주인공의 시선 >> - 바나나 농장 주인으로  A···라는 여자의 남편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아내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웃, 프랑크를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봅니다. 그러나 블라인드 너머로 지켜만 봅니다. 프랑크의 차로 시내에 나간 아내가 차가 고장났다는 이유로 외박을 하고 오지만, 주인공은 질투심을 억누른 채 객관적이고 치밀한 시각으로 관찰만 합니다.


  *  채 1미터도 안 되는 거리로 다가가서야 겨우 블라인드의 일정한 간격 속에 토막 난 풍경이 평행한 띠처럼 나타난다.  블라인드의 잿빛 나무 살이 그 사이사이를 더 넓은 폭으로 끊으며 마찬가지로 평행한 띠를 이루고 있다.




Observation



 *  벽에는  A···의 시선이 정면으로 가 닿는 곳에  (···) 짓이겨진 지네의 흔적이 나타난다. 흔적은 아주 또렷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와 부속 기관의 부분들이 지저분한 얼룩도 없이 정확한 해부도판처럼 지네의 윤곽을 매우 정밀하게 재현하고 있다.  더듬이가 하나, 꾸부러진 주둥이 턱이 둘, 머리와 제1 몸마디,  그리고 제2 몸마디 한 쪽,  긴 다리가 세 개다.  그다음 조금 더 희미하게 나머지 부분이 있다. 부서진 다리 조각들과 물음표처럼 경련한 몸의 형체 일부를 알아볼 수 있다.


  *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고 두 팔은 팔걸이 위에 얹고 있다.  팔걸이 주위에 이따금 두 사람의 불분명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아주 작은 폭의 움직임이어서,  시작했는가 하면 어느새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있다.  어쩌면 상상일지도 모른다.


  *  갈색의 큼직한 손으로 비슷한 모양의 크고 납작한 반지를 끼고 있다. (···) 갈색 손은 잠깐 동안 주위를 더듬더니 갑자기 셔츠 주머니로 다시 올라간다.  그 손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몇 센티미터나 비어져 나와 있는 여덟 겹으로 접힌 연한 파란색 편지를 더 깊숙이 넣으려고 한다.




Observation



*  지금 집은 비어 있다. A···는 프랑크와 함께 시내에 내려갔다.  급한 장을 보기 위해서다. 그게 무엇인지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  A···는 저녁 식사 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길을 떠나기 전에 프랑크와 함께 시내에서 저녁을 먹을 테니까.  (···)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저녁 식사 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어쨌든 소용없는 일이다.


  *   A···는 오래전에 돌아왔어야 한다. 그렇지만 늦을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  과거 속으로 멀어짐에 따라 진실성도 줄어든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조금 늦었지만 블라인드 하나를 반쯤 열고 틈새로 내다보았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확인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는 수 없이 블라인드의 얇은 나무 살을 조절하는 막대기를 움직여 블라인드를 다시 닫는다. 방은 다시 한번 밀폐된다.


  *  해는 이미 오래전에 떠올랐다.  남쪽을 향한 두 개의 창문 아래쪽, 닫힌 블라인드의 틈새를 통해 광선의 줄무늬가 침투해 들어온다.  태양이 집의 정면을 이 각도로 비추는 것으로 보아 이미 꽤 높이 떠 있는 게 분명하다.  A···는 돌아오지 않았다.




Observation



*  "그 댁 마님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보이가 말했다.  그는 이 '걱정하다'라는 단어를 모든 종류의 불확실성,  슬픔,  혹은 불안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틀림없이 오늘은  '불안해한다' 는 뜻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화가 나 있다', '질투하고 있다'  또는 '절망하고 있다' 는 뜻일 수도 있다.


  *  그녀는 아직 아침 실내복을 입고 있다. 머리카락은 아직 말거나 땋지는 않았지만 정성스럽게 빗겨져 있다.  머리가 햇살에 빛난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 곱슬거리는 머리 단이 부드럽게 출렁거리며 어깨의 하얀 실크 천 위로 검은 머리 타래가 떨어진다. 그러는 동안  A···의 그림자는 복도 쪽 벽을 따라 다시 방 안 깊은 곳으로 멀어진다.


  *  두 사람은 오고 가는 데 필요한 시간과 볼일을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서 출발 시간과 돌아올 시간을 정했다.  (···)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약속이 왜 과거의 비슷한 상황에서는 없었나, 오히려 그게 놀라울 뿐이다. 훨씬 전에, 옛날에는 말이다.


  *   A···는 조금 전부터 옆 자리의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마치 그의 입에서 막 나오려는 무슨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말이 없고,  기다리던 말도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두 사람은 그날,  그 사고, 또 그 밤에 대해 결코 다시 말하지 않았다.



Observation



  *  두 인물은 자동차의 보닛 앞에서 서로에게 다가간다.  덩치가 큰 프랑크의 실루엣이 같은 선상의 뒤쪽에 있는  A···의 실루엣을 완전히 가린다.  프랑크의 고개가 앞으로 숙여진다. (···)  그들은 이미 떨어져서 집의 출입문 쪽을 향해 안뜰의 자갈투성이 땅 위를 나란히 걸어온다. 두 사람은 적어도 1미터는 떨어져 있다. 정오의 높이 솟은 태양은 두 사람의 발밑에 그림자를 만들지 않았다.


  *  프랑크는 지금 떠났다.  A···는 자기 방에 들어갔다.  방안에 불이 켜 있지만 블라인드는 완전히 내려져 있다.  블라인드의 나무 살 사이로 여기저기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올 뿐이다.


  *  프랑크는 이와 관련해 고장 난 트럭에 관한 자기 자신의 일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A···는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손님에 대한 관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세한 것을 알고 싶어 한다. 손님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꽤 떨어진 자기 농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작별을 고한다.











                                             <페이지 생략> ><주인장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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