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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냥 Feb 09. 2024

누군가의 딸, 누나, 아내, 친구. 그리고 선생님

작은 반짝임으로

  삶의 흔적이 길어질수록 내가 맺는 관계가 늘어난다. 나를 부르는 호칭이 그만큼 다양해지며, 호칭에 맞는 역할로 옷을 갈아입는다. 나는 부모님의 딸이며, 두 남동생들의 누나, 그리고 남편에게 있어서는 아내다.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친구이자 동료일 수 있겠으며, 또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우리 선생님'이다.


  이토록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는 나라는 사람. 각 역할마다 최선을 다하되 잠식되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다. 처음 편마비 증상이 나타났을 때 나는 내가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일부러 모든 관계를 차단한 뒤 방에만 틀여 박혔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눈을 감았다가 뜨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나날이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나에게 장애는 불편한 것은 틀림없지만,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수많은 관계에서 '베풀고' '주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의 존재 의의와 삶의 목표가 내가 가진 것을 타인과 공유하며 이루어진다 믿었다. 하지만, 장애를 겪고 나서 그런 나의 생각이 얼마나 큰 오만과 편견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와 인연이 닿은 대부분의 이들은, 나를 절대 불쌍하다거나 안 됐다고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담긴 진심 어린 걱정을 보았을 때. 조금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주지 않아도, 이번에는 그들이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어떤 이는, 봄꽃이 벌써 피었다며 예쁜 꽃사진을 보내 주었다. 뜬금없이 달달한 것을 보내주고,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전화를 건다. 끊임없이 안부를 묻고 약속을 잡는다. 이전과 다름없이 내게 조언을 구하고, 인사를 건넨다.


  "언니! 다음에는 같이 퍼스널 컬러 받으러 가자!"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아는 동생. 그 순간, 머릿속으로 내가 맞닥뜨릴 수만 가지 난제가 스쳐 갔으나, 당연한 듯이 내가 자신과 함께 할 거라 믿고, '다음'을 약속하는 그녀가 귀여워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람은 결국 사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구나. 나는 요즘 이 말이 그토록 마음에 와닿는다.


  사람에게 받는 상처도 분명 있다. 나 역시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다 더 탈이 난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또한 사람이다. 함께 이야기하고, 깔깔거리고 웃다 보면, 비로소 내가 이 지구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생명임이 느껴진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정말 외향형 인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극 내향형. 완벽한 I형 인간이다. 사람이 많은 모임은 불편하고, 모임이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닫을 때도 있다. 나는 그저, 이렇게 내향형인 나의 곁에 끝까지 남아서 나의 힘이 되어 주는 이들을 사랑할 뿐이다.


  이제는 내가 맺은 수많은 인연들의 손을 놓지 않는다. 나의 자리를 지키며, 세계의 일부분이 된다. 그들이 나의 세계를 반짝이고 아름답게 만들어 준 것처럼. 나 또한 그들의 세계의 작은 반짝임으로 남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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