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담임선생님께서 방과 후 상담실에 찾아와 한 아이에 대해 자문을 구하셨다. 편의상 그 아이를 A 군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A군은 똑똑하고 공부도 곧잘 했으며 집안도 유복한 아이였다. 단 한 가지, 수업시간에 잘 참여하지 않고 내내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담임선생님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한다.
"선생님. 저는 왜 사는 걸까요."
"선생님. 저 같은 애는 그냥 죽는 게 나아요."
"저는 사는 이유가 없어요."
처음에는 담임선생님도 아이를 달래며, 그렇지 않다고 상냥하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점점 정도가 심해지니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고, 오늘은 다른 학부모에게 항의 전화까지 받았다고 한다. 같은 반 친구들은 물론 다른 반 학생들에게까지 'A군은 좀 무서워.'라는 이야기가 돈다고 한다.
"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대로라면, 아이가 5, 6학년이 되어서도 분명 학교생활이 힘들 거예요."
담임선생님과의 자문을 마치고, 나는 A군의 정서행동특성검사 결과지를 확인했다. 초등학교에서는 매년 1, 4학년을 대상으로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를 통해 학생들의 정서를 파악해 정서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선별한다. 학생들이 직접 검사에 참여하는 중, 고등과는 달리 초등은 학부모가 자녀의 상태를 고려해 검사에 참여한다. 만약 A군의 보호자가 현재 A군의 상태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면, 당연히 정서행동검사 결과에도 반영이 될 터였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A군의 정서행동특성검사결과는 너무나 정상이었다.
"A군의 어머니가 교사세요. 아이에게 거는 기대도 크시고요. 제가 아이의 상태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우리 애가 조금 독특하고 예민하긴 하지만 집에선 말도 잘 듣고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Wee클래스 상담도 당연히 거부하셨겠네요."
"네. 생각해 보신다고만 하시고, 이후엔 연락이 없으세요."
미성년자인 초등학생의 상담은 학부모 동의 없이는 진행할 수 없다. 문제 소지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인데, 나는 이점이 납득이 되면서도 안타깝다. 실제로 학부모가 동의하지 않아, 필요한 골든타임에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너무나 많다. 이전보다 상담에 대한 인식이 관대해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하지만 학교의 이점이 뭔가. 나는 상담사이면서도 교사다. 아이들과 생활터전을 함께한다. 일부러 A군과 마주치기 위해 4학년 교실이 있는 복도를 어슬렁거리거나 또래상담자 학생들에게 슬쩍 A군의 안부를 묻는다. 이런 순간에 또래상담자 학생들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으니 정말 든든한 지원군이다.
A군을 복도에서 만났다. 역사 홍보 포스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가 보네?"
"집에 있는 위인전기랑 역사서는 전부 다 읽었어요."
오. 의외로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준다. 제일 힘든 내담자가 말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름 희망적이다.
"대단하네! 선생님은 이런 거 붙어 있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거든. 이렇게 꼼꼼하게 읽는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어. 멋지다."
순간, 아이의 눈이 살짝 흔들리면서 표정이 싹 바뀐다.
"아니에요. 저 안 대단해요. 저는 한심하고요. 아무것도 못하고요. 멍청해요. 제 사촌인 누구는 벌써 고등학교 수학도 풀고 영어도 잘하고 외국인이랑 대화도 하거든요. 근데 저는 잘하는 게 없고요. 운동도 못하고요. 완벽하지 않고요. 그냥 죽는 게 나아요."
담임선생님의 말이 이해가 된다.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비하에 빠진 아이. 이게 한창 꿈으로 반짝일 초등학교 4학년과의 대화인가. 슬프기보다는 화가 난다. 이건, 누구의 생각인 걸까. 완벽이라니. 죽는 게 낫다니.
"누가 너에게 한심하고 죽는 게 낫다고 한 적이 있어? 그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선생님이 보기엔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더 한심한 거 같은데."
"왜요?"
"네가 지금 몇 살?"
"11살이요. 만으로는 9살이요."
"거봐. 이렇게 만 나이까지 똑 부러지게 말하는 네가 한심할리 없잖아. 그리고 그 사람은 뭐가 그리 잘났대? 뭐든지 완벽하려고 안 해도 괜찮아. 그런 사람도 실제로는 없고. 도중에 재미없고 못할 거 같으면... 그냥 때려치워! 괜찮아. 어른들도 도중에 포기하기도 해. 나도 그렇고."
'때려치워'라는 말에 A군이 풋 웃는다. 역시 아이는 우울한 모습보다 웃는 게 좋다. A군과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딩동댕동 종이 울린다. 정 없게도 A군은 '앗'하고 인사도 없이 교실로 뛰어 들어가 버린다.
다만 그 뒤로 A군은 종종 상담실에 얼굴을 비추곤 한다. 공식적인 약속은 아니다. 뜬금없이 와서는 담임선생님께 했던 것처럼 자기가 한심하다고 생각한다거나, 죽고 싶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
단,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우리의 대화 마지막에 A군이 "정말 그럴까요?" "저 안 한심해요?"라고 반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지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은 그 틈으로 긍정적인 생각이 파고들 여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주 자그마한 변화지만, 나는 그 아이가 스스로 이루어낸 작은 기적을 믿는다.
고작 11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나이다. 죽음을 말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다. 또한 실패가 용서되는 나이이며, 오히려 수많은 실패의 경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아이에게 포기와 좌절을 가르친 세상은 대체 뭘까.
A야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아. 그 이유를 네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도와줄게. 함께 걸어가자. 너는 가능성으로 넘쳐나고 충분히 지금도 반짝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