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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냥 Mar 03. 2024

이별의 아픔에 나이가 무슨 소용.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환승연애.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선배 상담교사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한다. "우리 학교에 학폭 사항이 발생했는데 말이야. 반에서 인기 있는 남자애를 두고 여자애 두 명이 서로 싸운 거야. 그중 한 명이 단톡방에서 다른 여자애 험담 한 게 걸려서 지금 아주 난리가 났다." 어쩐지, 선배의 표정이 유독 피곤해 보인다. 학교에 학폭 사항이 발생하면 상담교사의 업무량은 배가 된다.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선배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런 거 보면 초등에서 일하는 네가 부럽다. 초등학생들은 이성관계 문제는 잘 없지?"


    말없이 그냥 '하하.' 하고 웃어넘겼다. 지금 눈앞의 힘든 사람에게 구태어 '왜 없겠어요. 나도 힘들답니다.'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주고 위로와 힘찬 파이팅이면 충분하다.


  사실 학부모님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초등학생들도 의외로 연애와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리고 연애를 시작하는 연령대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수줍은 학생들의 모습은 딱 그 나이대의 풋풋함과 순수함이 묻어 있다. 또한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건전한 이성교제'를 강조한다. 물론, 좋아하는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며 돌변해서 상대를 미워하게 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좋아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은 어딘가 닮아 있는 듯한 생각도 든다.


  상담실에 이성관계 문제로 상담을 하러 오는 학생들을 만나면, 나는 눈앞의 학생을 그저 '어린아이'가 아닌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 보고자 노력한다. 설령 찰나의 감정이라고 해도, 몽글몽글하게 피어나는 감정의 색을 존중해 준다. 또한 학생들도 자신들의 고민을 가볍게 다루고 싶어 하지 않고, 진심으로 공감하고 조언해 주길 바란다. 즉, '어른의 연애 코칭'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지. 선생님도 연애는 그다지 자신이 없는데. 아이도 어른도 사랑이 어려운 건 똑같다.




  "걔가 저랑 헤어진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같은 반 여자애랑 또 사귀지 뭐예요! 선생님!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정신 나갔죠?"


  6학년 여학생이 씩씩 거리며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와 울분을 토해낸다. 내가 들어도, 충분히 열이 받을만한 상황이다. 어른들의 연애에서도 이런 '환승연애' 그것도 '내 친구에게 환승연애'는 뒷목을 잡을 일이다. 게다가 이 학생은 매일 같은 교실에서 전 남자 친구와 친구의 연애행각을 봐야 한다. 이 아이가 그 남자아이를 얼마나 좋아했던지와 상관없이, 충분히 심장이 쿵 내려앉는 상황임이 틀림없다. '연애의 마무리에도 예의와 존중이 필요하건만...'


  그렇다고 교사인 내가 학생의 장단에 맞춰 같이 상대 남학생이나 친구를 험담할 순 없다. 아이의 감정에 전이되면 안 된다. 공감을 하되, 이 아이와 나를 분리해야 한다. 또 '환승연애'의 주인공인 그 아이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양쪽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지금,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진짜 말도 안 되게 속상했겠다. 선생님도 그런 일을 겪으면 놀라서 말이 안 나올 거 같아. 그런데 그거 알아? 남자애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엄청 후회할 거야. 내가 이렇게 멋진 여자애를 못 알아봤구나 하고."

  "어... 근데, 걔가 저보다 훨씬 잘난 건 맞거든요. 공부도 잘하고, 축구도 잘하고, 춤도 좀 추고. 게다가 솔직히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크잖아요? 저 같은 애는 잊고 행복하게 잘 살걸요."


  아앗.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사랑에 빠진 소녀는 나이 불문, 이렇게 사랑스럽구나.


  "바로 그거야."

  "네?"

  "보통은 말이야. 그렇게 예의 없이 헤어진 상대는 마냥 욕하고 싶고, 단점만 보이고 그러거든. 그런데 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남자애의 좋은 점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잖아? 그건 네가 그만큼 예쁜 마음씨를 가진 아이라는 거지. 그리고 예쁜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얼에 나타난다? 물론 지금도 예쁘지만."


  아이가 반신반의하면서 말없이 손만 만지작 거린다.


  "언젠가, 너의 그런 장점들을 알아봐 주고 존중해 주는 멋진 사람이 분명 나타날 거니까. 기다리렴."


  아이가 한참을 말없이 생각하다가 역으로 내게 묻는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 만나셨어요?"


  아, 개인적인 얘기는 가능한 학생들 앞에서는 안 꺼내고 싶지만 이 타이밍에 '비밀이야.'라고 말하는 건 지금까지의 상담을 모두 수표로 만드는 것 같다. 미안, 남편.(이때는 결혼을 앞둔 예랑) 설마 이렇게 오픈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럼 만났지! 그러니까 자신 있게 너에게도 나타날 거라 이야기한 거지."


  이에 6학년 여학생은 흡족하게 상담실을 나가 교실로 올라갔다. 교실에 가면 또 전 남자 친구와 친구가 있을 테니, 또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아이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는, 씩씩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지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주어야겠다. 타인의 장점을 발견할 줄 아는 아이이니, 분명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소한 장점들도 찾아내 빛을 낼 것이다.


  아, 그리고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던 6학년 남학생과 친구의 환승연애는 또다시 그 남자아이의 환승이별로 끝이 났다. 이번에는 학원에서 만난 다른 학교 여학생이라나 뭐라나.


  이렇듯 초등학생들도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아파하고, 또 그만큼 관계와 만남에 대해 성숙해진다. 그러니 아이들의 연애를 마냥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반대하거나 혼을 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 모든 과정 또한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며 지나가는 일부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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