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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냥 Mar 03. 2024

초등학생 소외감 클럽을 만들었다.

홀수집단의 비극에 대하여.

  몇 년 전 또래상담자 학생들 전교생을 대상으로 앙케트 조사를 한 적이 있다.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과,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에 스티커를 붙여 투표를 하는 방법이었는데 결과가 사뭇 놀라웠다.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학생들의 투표수가 비슷했지만,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은 압도적으로 한 곳에만 집중적으로 표가 몰려 있었다.


  바로 '넌 필요 없어.'


   이 외의 후보로는 이런 문장들이 있었다.


  1. 넌 못할 거야

  2. 네가 이상한 거야

  3. 너랑 놀기 싫어

  4. 다양한 욕설

  5. 공부 좀 해라

  6. 너 때문이야

  7. 실망이야


  이는 우리 또래상담자 학생들이 고민 끝에 작성한 말들이며, 이 문장들도 실제로 누군가에게 듣는다면 마음이 무너질 만큼 충격적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어째서, '넌 필요 없어'라는 말에 유독 반응을 한 걸까.


  학교에서 학생들을 보면 유독 또래관계에 예민하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사실 노골적인 폭력이나 욕설, 따돌림은 적은 편이다. 그보다 우리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관계에 있어서의 폭력이다. 다시 말해,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혼자만 내팽겨질 것 같다는 '소외감'. 아이들은 이런 '소외감'이 자신을 향하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어른들 중에는 혼자가 좋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굳이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봐야 득이 될 것이 없고,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은 '혼자가 좋은 것'과 '혼자가 편한 것'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사람에게 상처받으면서도 사람에게 위로받으면서 나아가곤 한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혼자가 편한 아이들은 있어도 혼자이길 원하는 아이들은 없다. 또한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혼자를 '택'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여학생들은 특히 '홀수'에 집착한다. 3명, 5명, 7명. 그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챌 수 있다면 당신은 굉장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3명이서 친구가 되면, 체육시간에 짝을 지을 때도 애매하고, 소풍 갈 때나, 짝활동을 할 때도 불편해져요."


  학생들 말로는 그런 이유라고 한다. 그래서 홀수 집단에는 그 집단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학생이 친구를 선택할 '선택권' 비슷한 것을 갖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집단원들은 보이지 않는 그들만의 기싸움을 시작하곤 한다. '홀수'를 '짝수'로 만들어 집단의 안정감을 추구하려는 모험이다.


  "A가 너 잘난 척하는 거 꼴 보기 싫다고 쟤한테 말하는 거 들었어."

  "B가 나한테 너 재수 없다고 그랬어."

  "쟤 좀 나대는 거 같지 않아?"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말들이 '인기 있는 친구'와 더 가까워지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집단에는 갈등과 의심이 번진다. 즉, 제삼자의 눈으로 보기엔 파국이다.


  '아이고 복잡해라. 그럴 바엔 혼자 지내고 말지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오히려 가족보다도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함께 등교하고, 공부하고, 놀고, 운동하고, 밥을 먹는다. 혼자서 지내고 싶어도 학교의 커리큘럼대로 '바른 학생'이 되려면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학교는 그야말로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서열과 경쟁이 난무하는 작은 사회다.


  자신이 처음으로 속한 사회집단에서 내쳐진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큰 충격과 수치다. 상담예약이 없는 점심시간. 상담실에는 이처럼 집단에서 내쳐져 어쩔 수 없이 혼자가 된 아이들이 몰려온다. 교실에 있으면 혼자가 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고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 같다고 한다. 그렇다고 도서관에 가기에는 자신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변명을 한다.


  그렇게 점심시간에 상담실로 일종의 '대피'를 한 아이들은 각자의 소외감을 나와 다른 학생들에게 호소한다. 학년도, 반도, 성별도 다르지만. '소외받았다.'는 공통점 하나로 이 아이들은 또 다른 집단으로 묶인다. 일종의 집단상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조만간 5학년은 현장체험학습 가잖아요. 진짜 가기 싫어요. 버스에서 혼자 앉을 거 같고. 밥은 누구랑 먹어요?"

  "헐 나도!! 6학년도 현장체험학습 가는데 A무리 애들이 지들끼리 옷 맞춰 입는데. 와 진짜 재수 없어."

  "언니들 그냥 빠지면 안 돼? 아프다고 하거나 안 간다고 하면 되잖아."


  순진하게 묻는 3학년 여학생의 말에 5, 6학년 언니들이 동시에 발끈한다.


  "아, 쪽팔리잖아. 존심 상한다고."

  "언니 얜 아직 어려서 우리 맘 몰라. 참아 참아."


  대체 뭘 이해하고 참으라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언제부턴가 5, 6학년 학생 사이에 나름의 유대감이 생긴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 애들은 알까, 너희들이 참아 준다는 3학년 여학생도 사소한 실수 하나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친구들에게 내쳐졌다는 걸. 이쯤 되면 매주 수요일의 또래상담자 모임과 별도로 '점심시간 소외감클럽'을 만들어야 할 판이다. 나 역시 학교에서  의도치 않게 점심을 먹지 않으면서 선생님들 사이에서 묘하게 눈에 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소외감 클럽'의 주최자로 자격은 충분하다 생각한다.


  점심시간이나마 이런 학생들이 상담실을 자신만의 온전한 대피처로 느낄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리고 이 안에서 같은 아픔을 겪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만 그런 게 아니야.'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사실, 나 역시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은 '모두와 친구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으면 '아니. 교사가, 그것도 상담교사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나를 질책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홀수, 짝수를 맞춰 무리를 짓고,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고, 이야기를 지어낼 바에야, 당당히 '혼자'인 쪽을 택하겠다. 물론 이건 내가 어른이고,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선택지와 책임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지금의 자신을 떠올리면 어떻게 생각할까. '역시, 혼자는 싫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그땐 왜 이리 무리에 속하려고 애썼는지.' 라며 웃어넘길까. 어느 쪽이든, 부디 지금의 기억이 큰 상처로 남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말이야. 짝수든 홀수든. 그게 그렇게 중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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