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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들처럼 Oct 24. 2021

11. 미용실

사고 후 55일이 지났을 때 친구를 따라 미용실에 갔다

전철역 주변 신축건물에 새로 개업한 미용실은 환하고 널찍했다. 하얀색 인조대리석으로 마감한 실내는 최신 유행을 따라서 금색 금속 장식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인상이 좋은 30대의 남녀 미용사가 우리에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면서 가방을 받아 들고 가운을 건네주었다. 

등받이를 젖힐 수 있는 미용실 의자에 앉아서 나는 되도록 정면의 대형 거울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이를 떠나게 만든 내가 싫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죽었는데도 친구를 따라와 미용실에 앉아있는 현재가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아이를 따라 죽거나 미치거나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지 않은 채로 태연히 미용실에 앉아있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옆자리에 앉은 내 친구와 여자 미용사가 몸에 좋은 음식에 대해서 가벼운 수다를 떨고 헤어스타일을 어떻게 해주기를 원하는지 상의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젊은 미용사의 숱 많은 갈색 머리가 탐스러웠다. 반짝반짝 빛나는 실내에는 발라드풍 팝송이 잔잔하게 흘렀다. 갈색 파마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남자 미용사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어떤 색으로 염색해주기를 원하는지 헤어커트는 어느 정도 길이를 원하는지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어색한 침묵 후에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새치가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염색해주고 단정해 보이도록 적당히 잘라달라고 우물쭈물 부탁했다. 미용사는 현재와 비슷한 색을 원하는지 더 밝거나 어두운 톤을 원하는지 물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내가 어떤 걸 원하는지 생각하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나는 밝지 않고 차분한 톤으로 해달라고 대답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미용사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후에 염색약을 준비해왔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내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사고 직후에는 당시의 상황만 비디오가 재생되듯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다른 모습들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이가 더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가 예닐곱 살 됐을 무렵 바닷가에 놀러 갔던 날, 맨발로 해변을 돌아다니다가 모래 속에 득실대는 갯벌레를 발견하고 나는 소름이 쫙 끼쳤다. 아이에게 벌레를 가리키며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씩씩하게 대꾸했다. ‘아니에요. 나는 아주 힘세서 무섭지 않아요.’ 그 말을 하던 아이는 얼마나 귀여웠던지! 

단답형으로 ‘예’, ‘아니오’라고만 대답하던 아이에게 다양한 말을 해보도록 했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어색하게 ‘아니에요’하던 말투가 귀여워서 나도 따라 말하면서 놀리곤 했다. 엄마가 놀려서 속상해진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꼭 껴안고 달래주던 기억도 났다. 그 어여쁘던 아이가 열일곱 살의 키 큰 소년이 되었는데, 그 아이가 내 눈앞에서 죽어버렸다.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아니 어쩌면 오랫동안 그 여린 마음을 끝도 없이 괴롭혔던 나의 잘못 때문에.     

미용사가 내 머리카락을 여러 가닥으로 나누어 핀으로 고정하고 빗질을 하면서 염색약을 발라주었다. 편안한 회전의자에 푹 파묻힌 몸은 나른했다. 두피가 시원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는 게 또 슬펐다. 내 아이가 죽었는데, 나 혼자 남아서 머리에 기분 좋은 감각을 느끼는 게 눈물 나게 슬펐다. 미용사는 염색약을 다 바르고 비닐 헤어캡을 씌워주었다. 옆에서 파마약을 다 바른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오픈 기념행사로 삼십만 원을 적립하면 십오만 원을 보너스로 주는 이벤트 덕분에 할인을 받을 수 있어서 잘됐다는 내용이었다. 요즘에 흑마늘진액을 며칠 동안 복용했더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고도 말했다. 친구와 미용실에 와서 나누는 일상적인 수다였다. 되는대로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나는 아이가 했던 말과 천진난만한 표정을 계속 떠올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샴푸실로 가서 머리를 감고 두피 마사지를 받으면서도 내 머릿속은 아이의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십칠 년간 아이를 키우면서 기뻐하고 때로는 슬퍼했던 갖은 기억으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미용실을 나온 후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친구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러다가 친구에게 바로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는데 왜 내가 대성통곡을 하지 않는지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내가 마음 놓고 슬퍼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밖에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면 잠깐씩은 잊어버리기도 했다. 예전처럼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지금 아무렇지도 않는구나,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날이 완전히 저물고 나자 또 눈물이 나왔다. 좁은 스튜디오에서 내가 우는 걸 봐야 하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밖으로 나왔다. 영업을 종료한 가게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울다가 일어나서 또 어두운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면서 울었다. 그날 밤에는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여러 번 깼다. 꿈속에서도 나는 아이를 껴안고 몸을 어루만지며 행복한 기분으로 잠자는 중이었다. 내 아들의 따스한 몸을 안고 있는 나는 무척 행복했다. 손으로 열일곱 살 소년의 단단한 어깨, 거칠거칠한 등의 피부, 부드러운 배와 갈비뼈 사이의 오목한 골을 더듬었다. 운동복 바지의 허리춤을 만져보고 엉덩이를 쓰다듬고 바지 옆선의 흰색으로 스티치를 덧댄 천의 감촉까지 확인했다. 내 아이는 이렇듯 확실하게 내 품에 안겨있는데, 나는 나쁜 꿈을 꾼 것이 틀림없다고 안도했다. 영원히 그 꿈에서 깨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이가 죽고 없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현실은 깨어나지 못하는 악몽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되도록 다른 일에 몰두하면서 아이를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해보라고 말했다. 

내게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아이를 생각하지 않은 채로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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