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뼛가루는 산호 가루처럼 희고 고왔다
초라한 농막 앞 언덕배기에는 거친 들풀이 돋아나있었다.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에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수목장을 한 땅이 있었다. 자주 와보지 않아서 무성한 잡풀을 베어내고 돗자리를 깔았다. 미리 장을 봐온 올케가 사과, 배, 떡을 차려놓았다.
오빠가 먼저 술을 올리고 절을 올리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아버지, 우리 꼬맹이 잘 부탁해요.’
자상했던 아빠가 슬픈 얼굴로 바로 앞에 서 계신 것만 같았다.
내가 따라주는 술을 남편이 올리고 ‘아버님, 못난 사위 왔습니다’ 말하면서 절을 했다. 우리 둘 다 입에서 통곡이 터져나왔다.
"아빠, 죄송해요. 저희가 우리 애 제대로 못 돌봐서 이렇게 빨리 데려왔어요. 제가 잘못해서 어린 아이가 이렇게 일찍 왔어요. 죄송해요. 아빠가 아이 좀 잘 돌봐주세요. 아직 어린데, 너무 슬프고 아팠을 텐데, 힘들었을 우리 아이 좀 위로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아빠.”
한적한 곳에 땅을 마련해서 당신의 수목장을 한 후에 남은 가족들도 때가 되면 한 사람씩 오라고 한 것은 십여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땅을 사서 아버지를 모셨을 때만 해도 집안 식구들을 통털어 가장 나이가 어린 내 아이가 아버지 다음으로 여기에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남편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하얀 보자기를 풀었다.
나무 상자 뚜껑을 열자 흰 종이에 싼 뼛가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칠순이 넘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뼛가루는 회색빛에 거칠었는데 열일곱 살 소년의 뼛가루는 산호 가루처럼 희고 고왔다.
남편이 드넓은 풀밭을 돌아다니면서 뼛가루를 골고루 뿌렸다. 가끔씩 흐느끼면서도 쉬지 않고 어린 아들의 뼛가루를 땅에 뿌렸다.
멍하니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나도 뼛가루 한 줌을 쥐어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부지런히 뼛가루를 뿌리는 남편을 눈으로 좇으며 오빠가 올케에게 ‘마누라, 나 죽으면 저렇게 정성스럽게 뿌려라’고 말했다.
올케는 ‘내가 먼저 죽으면?’하고 되물었다. 오빠는 ‘안된다, 너는 나 죽고 십 년쯤 더 살아라’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죽음은 멀고 먼 일이었다. 하지만 내 아이의 뼛가루는 그 순간 내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뼛가루를 다 뿌린 남편이 빈 유골함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때껏 손에 쥐고 놓지 못했던 뼛가루 한 줌을 나는 다시 종이에 쌌다. 약첩을 싸듯이 작게 접어서 제수로 가져온 초콜릿 상자 안에 넣었다.
무심하게 갠 파란 하늘에 바람이 불어와서 흰구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오빠와 올케는 아이들 때문에 가봐야 한다며 먼저 일어났다.
그들을 배웅한 후 남편과 나는 농막 앞에 그냥 앉아 있었다. 오월 봄날 정오를 지나 차츰 이울어가는 노란 햇살이 따듯했다.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농막 열쇠를 가지고 와서 열쇠를 돌려보았다. 나무 문틀이 낡고 비틀어져서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농막 안에서 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누군가 살던 집처럼 낡은 옷들이 걸린 행거와 서랍장, 오디오세트, 소년 잡지가 꽂힌 삼단 책꽂이가 보였다. 비닐 장판 안쪽에는 스펀지 요가 깔려 있었다. 바닥에는 검고 굵은 먼지가 내려앉아있었다.
남편이 빗자루를 가져와서 바닥을 쓸었다. 나도 스펀지 요를 들고나가 풀밭에서 털었다. 어두운 농막 안에 들어가서 스폰지 요 위에 누우니 등허리가 편했다.
'삼우제 지낼 때까지 여기 있을까', 물었더니 남편은 싫은 기색을 했다. '밤엔 컴컴하고 추울 텐데'하고.
‘저기 이불도 있잖아’ 나는 서랍장 위에 개켜둔 차렵이불을 가리켰다. 남편은 말이 없었다.
한두 시간이 더 지나자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차를 타고 읍내로 나와 길거리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아무도 없는 시골 천변에도 산책로가 있었다. 잔디밭에는 노래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도 있었다. 남편과 나는 지자체의 선심성 공약과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시설물에 대해서 시답잖은 수다를 나눴다.
둘이 나란히 얘기하면서 걷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언제나 셋이서 다녔는데, 남편이 혼자 앞장서서 걸어가면 아이와 나는 둘이서 수다를 떨면서 따라갔는데. 뜬금없이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도 울었다. 둘 다 울음이 그치질 않은 채로 걸었다. 파랗게 풀이 돋아있는 천변을 걷다가 급기야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했다.
천변 길이 끝나고 길가로 올라와서 거리의 벤치에 앉아서 눈물을 훔쳤다. 남편은 담배를 피웠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차를 타고 이십 분쯤 달려서 근처 모텔로 갔다. 관광지도 아니고 지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곳이라 근처 공사장의 인부들이 트럭을 몰고 와서 하룻밤 묵어 가는 곳이었다.
깔끔하게 관리된 건물 안에 들어가자 온화한 중년 아주머니가 프런트에서 반갑게 인사했다. 어떻게 오셨냐는 물음에 남편이 근처 주말농장에 들렀다가 하룻밤 자러 왔다고 둘러댔다. 주인아주머니는 주말이지만 빈 방이 많으니 평일 요금만 받겠다며 전망이 좋다는 삼층 침대방을 권했다.
나는 높은 곳이 무서워서 이층방으로 달라고 했다. 온돌방 한구석에 깨끗하게 빨아놓은 이불이 쌓여있었다. 창밖으로는 야트막한 산이 보였다. 녹음이 우거진 산과 하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