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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ura Apr 01. 2024

실례합니다, 제 자리인데요

이곳에서도 두 명이 함께할 권리는 한명의 권리보다 중요한 듯 합니다.



혼자 기차를 타면 양보를 부탁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저는 해가 뜨거나 지는 시간과 방향을 계산하여 신중히 자리를 고르는 유난을 떨고 이를 위해 가능한 만큼 서둘러 예매합니다. 그런데 나란히 앉는 2인석을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양보를 부탁할 때면 정말 복잡해집니다. 이렇게 설명이라도 하면 차라리 다행인 수준으로, "우리가 둘이라 그런데..."하고 뒷말을 축약합니다. 아이와 보호자라면 창에 기대어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는 계획도 물리고 양보하고, 양보를 부탁한 쪽의 자리가 창가라면 한결 낫습니다. 둘이 꼭 같이 나란히 있어야 하는지, 예약을 제때 안 한 건지, 못한 건지도 알 수 없이 그저 둘이라는 말이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같이 한 방향으로 향하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는 것이 중요한 만큼, 내가 고른 창가 좌석에서 밖을 바라보며 안락함을 누리다가 책을 읽는 일이 몹시 중요하다는 말은 당연하게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자란 안락한 세계에서의 거주는 16살 때가 마지막이고, 그러므로 원래의 둥지로 향하는 길에서 엄청난 안도를 느낀다고, 그리고 가는 길마다 마음이 편안했기에 이젠 기차를 타는 일이 복잡함에 지친 나를 위로하게 되었다고,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꼭 바라봐야만 한다고. 그래서 혼자라는 이유만으로 둘을 위하여 고르고 고른 자리를 양보하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원래 그런 거야"라는 어른들의 말은 나름의 타당함을 갖추었기 때문에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의 법칙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법칙을 이겨내고 말합니다. "제가 이 좌석을 선호해서 예매한 것이라서요. 죄송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말하며 싱긋 웃을 수 있게 되기까지 자그마치 3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법칙이 타당하거나 옳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법칙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작용을 하고, 그래서 이겨내야 하는 것이겠죠. 






 

 지난달에는 파리로 향하는 기차를 탔습니다. 자기가 먼저 탔고 나중에 내린다는 이유로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실례합니다, 여기 제 자리인데요"라고 말했습니다. 원래 자기 자리였던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한 뻔뻔하지만 무엇이 문제냐는 무심한 표정에 대꾸할 힘이 없어 그 자리에 앉아서 갔습니다. 콘센트가 있는 창가자리를 찾아서 예매했으며 좌석을 지정하기 위해 추가비용까지 지불했다는 말은 결국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또 커플이 나란히 있는 자리가 제 자리였습니다. 미안하지만 저 쪽이 내 자리인데 양보해 줄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저기 앉으세요"라는 말에 말문이 턱 막히더군요. 

 

"제가 이 자리를 선호해서 예약한 것이라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불어로 하기까지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요. 3년의 시간을 이미 겪었으니 다음번에는, 아니 다음 주나 다음 달 쯤에는 좌석비용과 추가비용, 그리고 선택한 자리에 앉을 권리까지를 온전히 지켜내고 싶습니다. 죄송하다고 굳이 말하지 않기까지가 최종 목표이지만, 거절에 대한 완곡한 표현과 유감의 표시로 아직은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차별이라고 생각하기 쉬웠을 텐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곳에서도 두 명이 함께할 권리는 한 명의 권리보다 중요한 듯합니다. 오히려 여러 사람의 결집력이 지닌 힘을 아는 곳이어서 더 그런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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