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다. 눈과 입이 멥다. 눈물이 흐르고 따갑다.
"따당 땅 따당!" 최루탄 쏘는 소리가 굉음을 낸다. 여기저기 학생들이 뛰어다닌다. 이 모습은 80년대 대학가의 흔한 풍경이다.
우리가 전경대원과 대치할 때 마주하는 눈빛을 보며 시대의 아픔을 느꼈다.
내 친구, 선후배가 아닌가?
#두려움
5.18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고흥에서 살았다. 오월 어느 날, “광주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군인들이 사람들을 보면 마구 총을 쏜다.”며 아버지는 우리 식구를 모처로 피신시켰다. 하루 저녁이지만 얼마나 무서웠는지? 잠이 오지 않았다.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고흥에서조차 느끼는 두려움이 이 정도였는데, 광주에 살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 인도주의 정신
5월 18일부터 5.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군인들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구타하고 학살하자, 시민군이 만들어지고 광주시민들은 주먹밥과 헌혈로 지원했다.
전남도청에서 가까운 광주적십자병원에는 부상자로 가득찼다. 수술할 피가 부족하자 수 백명의 시민들이 팔을 걷어 부쳤다. 당시 근무한 선배의 목격담은 이렇다. “ 부상당한 학생과 시민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있었다. 성난 시민들의 눈을 피해 다른 곳으로 빼돌리기도 했다.”
적십자는 정부의 보조자지만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적군, 아군 차별 없이 구호한다는 인도주의 정신과 중립의 원칙에 의거 열흘 동안 철야 근무를 하면서 부상자를 치료했다. 당시 치열했던 모습들을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엿볼 수 있다.
# 역사적 장소가 된 광주적십자병원
1992년 나와 광주적십자병원, 적십자와 인연은 시작되었다. 처음엔 이곳이 5.18과 연관되었는지 몰랐다. 누구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선담당 이 주임님이 술 한잔하시고 그날들의 참상을 털어놓았다. “ 말도 말아, 아비규환이었지, 총상환자라 피를 많이 흘렸지, 여기저기서 가족들이 오열하고... ”
이 참담한 상황을 지을 수 없어서였을까? 40년이 넘었지만 병원 건물은 거의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다.
# 사적지
적십자병원답게 유독 행려 환자가 많았다. 실은 다른 병원에서 잘 받아주지 않는 탓이 컸다. 버려진 사람들, 아파야 실려 오는 곳, 그들에게 그래도 적십자병원이 있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6년 적십자병원은 경영난으로 서남대학교병원에 매각된다.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싶었다.
그런데 광주시가 옛 광주적십자병원을 5.18 사적지 제11호로 매입하여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었다. 앞으로 건물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내부 보수공사를 통해 교육관, 헌혈의 집, 방문자센터 등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1859년 이탈리아 솔페리노 언덕에서는 큰 전투가 있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까스띨로네 마을 교회는 부상자를 구호하는 치료소가 되었다, 오늘날 그곳은 인류애를 실천한 적십자 유적지로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다.
이처럼 옛 광주적십자병원도 인도주의 정신을 구현한 역사적 현장으로 자리 메김이 되었으면 싶다.
#공공의료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고 환자를 수용할 병원이 부족했다. 다들 꺼렸다. 이런 가운데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적십자병원은 공공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공공의료는 운영이 어렵다.
"매달 직원들 월급 줄 수 있나 고민한다", "전담 병원 인식 때문에 지역주민이 찾지 않는다".
코로나19 이전 수준 회복까지 최소 4년 이상이 소요될 거라고 한다.
적십자사는 7개의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일선 원장들은 "공공의료는 평상시에도 적자를 수반한다. 그런데 여기에 전담병원까지 운영했으니 회복이 쉽지 않다. "라고 걱정하고 있다.
코로나 팬더믹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전담병원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 지 알게 되었다. 공공병원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정부지원이 더 필요한 이유다.
# 그날이 오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
한 동안 부를 수 없었던 금지곡이 다시 불리자
가슴이 먹먹하다.
올해 오월에도 어김없이 봉사원들과 함께 5.18 묘역을 찾아 묘비를 닦고 꽃을 새롭게 갈아 끼웠다. 그리고 추념일 당일 묘역입구에서 오월 주먹밥을 나누어 주며 5.18 당시 학생과 시민들의 정의로운 눈빛을 상상해 보았다.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물음,
1980년 오월 그날에, 적십자병원에 있었다면
“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
오월의 햇살이 비친다. 유난히 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