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민정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준이는 선생님이 맡아주셔야죠. 저는 지금 수업 준비 중이에요.”
민정 선생님은 이 반의 일반교사였다.
나는 특수교사로, 발달지연 유아의 개별 지원을 위해 배치된 사람이다.
유아 장애통합교실. 이름은 ‘통합’이지만, 실제 수업 운영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수업 계획은 민정 선생님이 전담했고, 나는 그 계획에 따라 장애 유아의 활동을 변형하거나, 옆에서 보조하는 방식으로 일했다.
표면상으로는 협력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보조자'에 가까웠다.
수업 전날, 계획안을 공유받을 때면 늘 비슷한 말이 붙었다. “개별 지도는 선생님께서 조정해서 봐주세요.”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역할은 점점 한정되었다.
장애 아동을 위한 개별 계획은 내 손에서 끝났고, 수업은 민정 선생님의 무대였다. 교실 안에는 자연스레 보이지 않는 경계가 생겼다.
활동시간 도중, 하준이가 색깔 매칭을 어려워하자 민정 선생님이 내게 손짓했다. “이거 좀 봐주세요. 얘는 집중이 너무 짧아요.” 그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내게만 전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미술활동 시간에 아이들은 나비를 만들고 있었다.
하준이는 종이를 자르지 못한 채 가위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이에게 다가가려다 민정 선생님이 먼저 움직여서 멈췄다.
“하준아, 이건 이렇게 접는 거야. 같이 해볼래?” 그녀는 아이 옆에 쪼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시범을 보였다.
아이는 처음엔 머뭇거리더니, 이내 나비 날개를 따라 접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소미가 다가왔다. “하준아, 내 나비랑 같이 놀래?” 하준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정 선생님과 나는 잠시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수업이 끝난 뒤, 민정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사실... 저도 가끔 답답했어요. 수업은 제 몫인데, 장애 아이들은 잘 못 따라오고... 그래서 선생님께 넘기는 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제가 교사의 일부가 아니라, 보조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어요.”
그날 이후 우리는 달라졌다.
수업 계획안은 함께 조정하기 시작했고, 활동 전에는 하준이의 반응을 예측하며 대응 방안을 의논했다.
나는 단지 장애 아동의 ‘도우미’가 아니라, 교실을 함께 꾸려가는 ‘교사’로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민정 선생님이 먼저 말했다. “이번 주 수업은 하준이도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게 구성을 좀 바꿔봤어요. 같이 봐주실래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야 진짜 ‘같이’ 수업하는 것 같네요.”
그날이후로 ‘이건 선생님이 맡아야죠’라는 말은, 더 이상 교실에서 들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던 경계는 천천히 흐려졌고, 그 사이로 우리는 나란히 서 있었다. 하준이의 나비가 교실을 조용히 날아오를 때, 진짜 통합은 함께 고민하고 나누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