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찬란한 도피 10, 아름다운 고미습지

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by 나나 Dec 04. 2024


우리의 차는 타이중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교외로 향하기 시작했다.

잠시 잠들었다가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창 밖 저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미습지에 도착하기 직전, 가이드 아저씨는 우리에게 일몰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일단 근처 풍력발전기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어느새 친해진 사람들과 돌아가서 사진을 찍어주고, 길거리 노점에서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마시고 있으니, 점차 하늘이 주황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몰 시간에 되었다. 

가이드 아저씨는 우리를 고미습지의 입구로 안내해 주었다. 



고미습지


아름다운 고미습지


아! 아름답다. 

오늘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풍경이었다. 

어쩌면 타이중을 여행하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광경일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 우리가 조금 전까지 시간을 보냈던 풍력발전기가 보였다. 풍력발전기를 배경 삼아 햇빛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붉은 노을, 양털 같은 구름, 바닷물에 반짝이는 윤슬까지..

내가 상상해 왔던 고미습지의 아름다운 광경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마음이 많이 힘들 때, 나는 일부러 더 자연을 찾아다녔다. 

시간이 없을 때는 하다못해 동네 뒷산이라도 올라가서 마을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면, 답답했던 마음속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자연 속에서 나는 한낱 미물이고, 내가 미물인 것처럼 나를 괴롭게 하는 그 사람 역시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상황들과 그녀가 내가 내뱉었던 모진 말들이 다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여행 친구가 찍어준 사진. 너무 화보로 찍어줘서 감사했다.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


나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던 관리자의 말들, 나의 희생을 당연시 여겼던 사람들,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건들- 그 하나하나를 몽땅 이 드넓은 자연 속에 쏟아버렸다. 마음속에서 돋아있던 가시들이 이 아름다운 고미습지의 풍경 속에 녹아내려 그저 작고 볼품없는 먼지처럼 사라지길 바라본다. 





해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바람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대만은 한국보다 남쪽에 있으니, 당연히 따뜻하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섬나라 바람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한국, 그것도 내륙 중에 내륙에서 살아온 나는 바닷바람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지 못했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펄럭이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고미습지의 풍경을 뒤로하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가이드 아저씨가 우리에게 하차장소를 정했는지 물어보았다. 이번 투어는 하차 장소를 펑지아 야시장과 고속철도역에서 고를 수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나만 고속철도역을 선택했다. (내가 이렇게 눈치가 없다.)

가이드아저씨는 나에게 “이 차는 다 펑지아를 간다고 해서, 다른 2호 차량을 타야 해요”라고 설명했는데, 2호 차량도 모두 펑지아에서 하차한다고 했다. 그러자 가이드들이 모두 "나나씨, 타이중까지 왔는데, 왜 펑지아를 안 가요?”라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6시 ~ 6시 30분 정도에 고속철도역에 도착하면 타이중에 있는 발레학원을 가려고 했는데, 다들 펑지아야시장만 간다고 하니 결국 나도 못 이기는 척 펑지아야시장 행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펑지아 야시장




중국에서 살 때, 종종 야시장을 갈 일이 있었다. 

야시장에 가면 '이런 걸 누가 사지?' 싶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물건들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나도 모르게 홀린 듯, 그런 물건들 몇 가지 구입하고는 했다. 지금은 거저 줘도 입을 것 같지 않은 티셔츠나 기숙사 방에 장식할 봉제인형, 호피무늬의 털이불...

그렇게 양손 가득 쇼핑을 하고, 야시장 초입에 있는 양꼬치 노점에서 회족 아저씨들이 구워주는 양꼬치 몇 개를 먹다 보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거기에 쏸메이차까지 한 잔 마셔주면 게임오버!


내가 알고 있는 야시장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펑지아 야시장은 내가 생각했던 야시장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펑지아 대학 근처에 잘 형성된 번화가의 느낌이 더 강했다. 


이번 투어를 함께했던 다른 한국인들과 다 함께 펑지아 야시장을 돌며 먹을 것들을 구경했는데, 총요삥 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있길래 “여기 맛집인가 봐요!”라며 바로 따라서 줄을 섰다. 그리고 무슨 맛을 먹을지 고민했는데, ‘왕관’ 그림이 있는 것이 추천 메뉴겠지? 라며 바로 흑후추맛을 골랐다. 무슨 맛을 먹을지 모를 때는 무조건 흑후추맛이 최고다. 나는 흑후추맛, 다른 사람들은 치즈맛과 오리지널을 구입해서 서로 조금씩 나눠먹기로 했다.


1/4조각부터 1/2, 1장까지 고를 수 있는데, 다들 1/2장을 선택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양이 꽤 많았다.

아-, 1/4조각도 판매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너무 배불렀다. 

사실 야시장은 조금씩 자주 사 먹는 게 재미인데, 총요삥을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다른 음식들은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야시장 음식들을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 한채 나의 첫 대만 야시장 투어는 이렇게 끝내기로 했다. 



마침 동행했던 여행친구들과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투숙해서 다 같이 버스를 타고 타이중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서로 정신없이 수다를 떠느라, 목적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점점 더 외곽으로 나가는 기분이라 뒤늦게 구글맵을 확인했는데,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으아! 내려야 해요! 내려!!"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혼자였다면 멘털이 붕괴되고, 난감했을 상황이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니 용기가 생겼다. 당황스럽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되려 재미있는 추억거리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처음 타본 대만 버스


목적지에 도착해서 다들 아쉬운 이별을 했다. 어쩌다 보니 서로 통성명도 제대로 안 했지만, 우리는 오늘 하루 그 누구보다 친한 친구처럼 여행을 즐겼다. 이것이 여행이 주는 묘미이다. 서로의 배경, 각자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같은 곳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언니, 대만 환도여행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여행 잘하세요."


횡단보도를 건너 각자의 길로 걸어갈 때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 친구가 없었다면 오늘 하루가 어땠을까? 그녀 덕분의 오늘 하루가 더욱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다. 그녀도 대만에서 나와의 만남이 찬란했길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찬란한 도피 9, 무지개마을과 궁원안과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