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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것만 보며 살기

Chapter 5. 황홀하다, 황홀하다는 말이 좋겠어요

by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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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살던 동네 많이 변했어."


몇 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나는 오랜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은 내게 하나같이 우리가 살던 동네가 엄청나게 변했다고 전했다. 재개발이 시작될 무렵, 나는 취업을 하면서 이사를 나왔는데 내가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미국에서 살다 오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동네는 말 그대로 천지개벽을 한 것이다.


옛 동네 구경을 하고 싶어 유튜브에 검색을 해보니 여러 유튜버가 개발 호재, 교통 호재 등으로 현장방문을 다녀온 영상들이 나온다. 예전에 저 길가를 따라 유치원을 다녔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기억과 일치하는 것은 큰 도로의 모양일 뿐, 주변 환경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 동네는 서울의 구시가지였기 때문에 구불구불한 골목과 언덕을 따라 낮은 한옥들(누군가는 흙집이라고도 한다)과 붉은 벽돌의 연립빌라들이 뒤엉켜있었다. 그나마 잘사는 아이들은 빌라에 살았고, 그중에서도 못사는 축의 아이들은 햇빛도 들지 않는 마당이 있는 흙집에 살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동네, 그 골목, 그 집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색이 없다.


동네에서 나무와 같은 자연을 구경하기는 힘들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둘러싼 나무들을 보거나 이따금 배드민턴을 치러 몇십 분을 걸어 나가면 있는 동네 공원에 갈 때 수풀을 봤다.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나는 꿈을 꾸면 꼭 그 동네에서 살았던 낡은 한옥이 나온다. 동네가 온통 잿빛 혹은 흑백 빛이어서인지… 나는 한 번도 선명한 색의 기억이 잘 없다. 그 동네와 집은 꿈속에서도 그리고 나의 기억에서도 잿빛으로 남아있다.


그런 내가 TV에서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멋진 풍경과 흰색과 초록색으로 페인트칠 되어있는 이층집을 보았으니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SNS와 인터넷의 발달로 손바닥 안에서 전세계를 볼 수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해외 풍경을 보는 것이 참 귀한 일이었다. 그렇게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방문은 나의 버킷리스트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초록 지붕집 식구들이 먹는 음식은 어떠한가!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음식들은 소설에서는 오후마다 차를 마셨는데 어린 내 눈에는 매우 의아했었다. 왜 감자농사를 짓느라 힘들었을 매슈 아저씨와 일꾼 제리에게 밥은 안주고 차를 주는걸까? 그도그럴것이 내가 알고 있는 티타임이란 집에 손님이 왔을 때 둘, 둘, 둘 황금비율로 탄 인스턴트 커피와 깎은 사과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이 티타임은 커피 한 잔이 아니라, 감자와 고기 등이 나오는 엄연한 저녁 한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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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2121 (1).JPG [그리니치(Greenwich) 프린스 에드워드 섬 국립공원 안의 풍경]


샬롯타운의 호텔을 베이스 삼아 우리는 에이본리와 흰모래마을의 배경이 된 마을 등 섬 구석구석을 드라이브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섬에는 중간중간 작은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등으로 페인트칠해져 있는 집들도 아기자기하게 예뻤고, 어디를 가나 작은 연못이나 호수가 있어 눈이 부셨다. 하늘은 파랬고 사방이 확 트여있었다. 철이 많아 유독 붉은 땅까지 모든 색이 선명했다. 회색 시멘트로 덮였던 내가 자란 동네와는 다른 선명한 형형색색이 눈에 가득 찼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처음 방문한 앤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앤의 유년 시절 역시 잿빛으로 가득 찼다. 고아가 된 앤은 나무 그루터기만 남은 작은 개간지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며 살았다. 무척이나 쓸쓸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고아원에서 잿빛 원피스를 입고 머무르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온 것이다. 앤이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멋진 풍경을 보고 느꼈던 감격이 나와 비슷했던 이유였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아쉬웠던 점은 흐린스 에드워드 섬 여행 중, 케이크를 곁들여 여유있는 차 한 잔을 마시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의 일정에 맞추어 아침에 일어나 호텔에서 조식을 든든하게 먹고, 점심때즈음 여행을 하다가, 오후에는 아이 낮잠을 재우고, 저녁에는 샬럿타운으로 돌아와 일찍 잠을 청해야했다. 그래도 매일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특산물인 감자 요리를 먹으며 감자 농사를 짓던 매슈 아저씨를 떠올렸다. 또한 지역 과일 잼 몇 병을 기념품으로 구입해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몇 개월 동안 잼을 빵에 발라 먹을 때마다, 찬장에 잼을 만들어 두었던 마릴라의 솜씨를 상상했다. 눈으로 그리고 입으로 빨강머리앤과의 추억을 담고 또 담았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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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날 위해 멋진 풍경을 보여주거나, 근사한 한 끼를 차려주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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