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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Nov 13. 2021

가족이라는 말이 가장 잔인했다.

2월 2일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생과 나는 집에서 아침을 먹고 1인실에 있는 엄마에게 가던 때였는데

이른 아침 아빠의 전화가 오자마자 엄마가 돌아가셨구나 라고 알아챘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녔는지 택시도 아닌 마을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길이 잊히지 않는다.


"어머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따님 아드님 보시기 힘드실까 봐

아버님 요청대로 호흡기만 연결해둔 상태라고 보시면 돼요" 라는 담당의사 선생님 말대로 엄마는 이미 보랏빛 시신이 되어있었다. 호흡기 연결을 뺀 후 엄마의 가짜 숨마저 멎었고 아빠는 형제들에게 지인들에게 그리고 장례식장에 그 사실을 알렸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같은 지역에 살던 큰 엄마였다.

그녀는 우리에게 사람은 죽고 난 직후엔 죽은 사람 귀가 한동안 열려있으니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동생과 나는 그럴 뜻이 없었다.

우리 눈빛을 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정색을 한 큰엄마는 엄마에게 속삭이며 말을 했다.

"애들은 걱정 마 동서, 우리가 잘 돌볼게. 걱정 말고 가."


엄마 장례가 끝나고 아빠는 가장 보고 싶었을 본인의 엄마.

우리 할머니를 뵈러 큰집에 우리를 데리고 찾아갔다.

우리를 잘 돌보겠다던 큰엄마는 아빠와 동생 그리고 나를 10분도 머물지 못하게 하고 쫓아냈다.


아빠는 본인의 엄마를 보자마자 엎드려 울었는데,

할머니도 막내아들이 안타까워 그런 아빠 등을 치며 울었는데,

그녀는 곧 본인 딸의 예비 신랑이 인사 온다며 작은 유리컵에 주스를 반도 채워주지 않은 채 어서 먹고 가라며 재수 없다는 듯이 노려보며 우리를 내쫓았다.


몇 년 뒤 큰엄마의 딸인 친척 언니는 같은 식당 안에서 내 동생과 나를 보고도 모른 체 지나간 일도 있었다.




엄마의 죽음, 그건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 세 달이 지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TV 뉴스에서 이제 암은 절대 죽는 병이 아니라며 치료제가 개발이 가까워졌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을 때 

"시발 개 같은 소리 하네" 라며 신경질적으로 TV를 꺼버렸던 아빠는 이미 깊은 술독에 빠져 있었다.


나는 부인 없는 아빠와 엄마 없는 남동생과 살아야 하는 기댈 곳 없어진 고아가 되어있었다.


감기약을 집어삼키며 물을 먹고 바로 눕는 아빠에게

"아빠, 바로 누우면 약이 장에서 녹아 속이 쓰리대. 좀 앉아있어" 라며 옷장에 아빠 등을 기대어 주었다.

난 엄마가 늘 우리에게 해주던 말을 하며 어설프게 이 집안에 장녀로 시간을 버티고 있을 뿐이다.


나는 우울증에 걸려야만 할 것 같았는데 그럴 겨를 조차 없었다.

친척들은 하루가 다르게 연락을 해왔고 그들은 내겐 가족이 아닌 적이고 원수였다.


"아빠는 잘 있냐"

"아빠가 내 전화를 안 받는다"

"아빠가 제일 많이 힘들 거다"

"아빠 술 자제시켜라. 아빠가 건강해야 너네가 있다"

"네가 장녀로서 아빠도 챙기고 동생도 챙겨야 한다"

"넌 엄마와 지낸 시간이 있지만 동생은 너무나 짧았으니 네가 해야 할 역할이 크다"


그래, 여전히 곱씹어 보아도 그들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엄마를 잃어 슬퍼해야 할 시기의 내겐 가혹한 말이었다.

본인들의 아버지, 어머니는 서로 모시라며 나 몰라라 하던 친척

큰 아들이니 억지로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친척

그들 모두

남자 형제 중 가장 막내인 아빠와 우리 집 막내인 동생만을 걱정했다.

나는 절대적으로 배제된 걱정으로부터 안 그래도 힘든 시간이 더 지옥 같았다.


반면 외갓집 식구들은 엄마의 장례식 장안을 지키지 않았다.

여자 형제 중 막내였던 엄마의 죽음이 그들의 잘못인 듯 제발 들어와 편하게 계시라는 아빠의 힘겨운 인사에도 본인들이 죄인이라며 장례식 장안에 있는 것을 죄인처럼 여겼다.

아픈 여자도 아픈 엄마도 아니었는데 본인들과 산 세월보다 우리 집에서 산 세월이 더 긴 엄마였는데 그래서 병이 걸렸다 해도 우리의 탓일 텐데 외갓집과 친가의 온도 차이는 내게 너무나 아픈 감정을 주었다.


내 안부를 묻지 않는 친가와 무조건 죄인인 외가를 보며

엄마 없는 시간을 버텨야 하는 내게 친가 친척은 가장 원수고 적이 되어버렸다.


막내며느리인 우리 엄마가 본인들의 아버지 똥 수발까지 들고 마지막을 지켰을 때 빈손으로 집에 와

우리 엄마 음식 못한다고 흉봐놓고는

우리 엄마 촌스럽다고 늘 앞 담화해놓고는

갑자기 어른 행세를 하는 친가 친척들의 원망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몇 년 전 내가 출산을 했을 때도 외갓집에서만 연락을 주었고 마음을 전해주었다.

친가 친척은 그즈음에도 내 출산에 대한 인사는 일절 없이

이미 형제와 손절한 아빠와 연락이 닿지 않자 내게 연락하여 아빠의 안부를 물었을 뿐이다.

이런 통화들의 끝엔 늘 오열하는 내가 있었고 '이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나 역시 모든 연락을 차단하여 내게 친가 친척은 없는 상태이다.

가족이라는 말이 가장 잔인했다.

힘든 일이 코앞에 닥쳤을 때 진짜 내 사람과 아닌 사람이 구분 지어진다고 하더니 그 당시 내게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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