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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Nov 16. 2021

그곳이 무서워졌다.

난 엄마의 장례를 끝내고 엄마로 인해 만든 모태신앙이었던 천주교를 쉬고 있다.

이미 11년을 쉰 상태이고 언제 다시 찾을지는 모른 채로.


장례식 내내 성당분들이 장례식장에 오셔서 연도와 기도를 해주었는데

정말 죄송하지만 그 당시 나에겐 누군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기도가 고맙긴커녕 속 시끄럽게 느껴졌다. 내 상황 때문에 느낀 바겠지만 엄마 잃은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참 불쌍하다'라는 점도 못 견딜 만큼 싫었다.


"안녕? 나 ㅇㅇ이 아빠야" 라며 처음 보는 아저씨가 내게 인사를 걸어왔다.

성당분들과 함께 엄마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셨는데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의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되고 정말 놀랐다. 그 언니와는 성당에서 알게 된 사이가 아녔으며 천주교 집안이란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드는 생각은 감사함이 아닌 그 언니가 집에 우리 엄마가 죽은 걸 어찌말 했을까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어머 어떡하니'라는 걱정 담긴 모든 대화들이 상상되었다.


장례식 내내 성당분들의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가 이렇게 된 일로 성당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이다니 모르는 집 어디서든 우리 집 얘기를 하고 있겠구나 느껴졌다.




종교와 멀어진 사건은 바로 이어졌다.


3일의 장례가 끝나고 바로 화장터로 가는 줄만 알았는데 엄마의 관을 들고 성당으로 향했고 성당 맨 앞인 재단 앞 관을 두고 장례미사라는 걸 시작했다. 세상에, 장례미사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던 내겐 너무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신부님은 진심으로 기도해주셨다.

"ㅇㅇ님은 늘 주말 아침 묵묵히 성당에 나오셔서 열심히 기도를 드리던 모습이 기억납니다"로 시작되던 말씀까지 모두 기억난다.


엄마가 생전 했던 말도 나중에 엄마 죽으면 제사 지내지 말고 꼭 *위령기도를 해달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아빠 역시 장례미사는 엄마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해한다.

신부님 수녀님 신도분들 엄마의 장례와 장례미사가 끝날 때까지 우리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주셨을 거란 것도 안다.


하지만...

장례미사를 시작할 때 재단 중앙통로로 엄마의 관과 동생, 내가 입장했다.

장례미사가 끝난 뒤엔 다시 중앙통로로 엄마의 관과 동생, 내가 퇴장했다.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나는 그제야 울었다.


엄숙한 분위기의 미사에 '우리 엄마 진짜 죽었구나' 그제야 실감했다.

모두가 보는 중앙통로로 엄마의 관과 함께 이동하며 '우리 엄마 죽었어요'라고 모두에게 알렸다.

씩씩한 듯 장례식 내내 눈물 없이 보낸 내겐 여전히 그날 그 장례미사가 충격이고 공포스럽다.




이후 우린 엄마에 의해 다니던 성당을 안 가게 되었다.

아빠는 엄마와 열심히 성당을 다녔는데 엄마가 죽은 후부터 단 한 번도 성당에 간 적 없다.

동생은 언젠가 말했다. 신이 어디에 있냐고. 그 안에 담겨있는 말들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엄마는 천주교 추모관에 모셔졌고 나는 꽤 자주 그곳을 간다.

위령미사 봉투 역시 갈 때마다 잊지 않고 있다.

엄마가 바랐던 것은 위령미사뿐이 아녔을 것이다.

우리가 꾸준히 성당을 다니길 바라겠지.


하지만 내겐 잔인했던 장례미사 이후 괜스레 엄마를 내게서 빨리 데려간 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성당이란 장소는 여전히 내게 그날의 기억에 멈춰있다.



* 위령기도 - 죽은 사람을 위해 하는 기도, 소액의 금액과 함께 세례명을 적어 봉투를 넣어두면 미사 전에 신부님이 기도 해 드려야 하는 분들의 세례명을 불러주시고 미사를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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