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
남편의 친구 모임에 갔다.
얼마 전 아이를 출산한 남편 친구의 와이프도 모임에 나왔는데 나보다 10살 가까이 많은 언니였다.
낳은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나와 간만의 술자리에 몹시도 신나 보였다.
그리고 술자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애를 낳아보니 친정엄마 없이 애를 낳고 키우는 건 그냥 불가능 그 자체더라?
그래서 요즘 초희 생각을 어찌나 자주 하나 몰라."
평소 친하게 지내며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도 아니었고
그 언니의 출산소식에 축하를 건네던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본인의 육아 중 내 생각을 했단 점과
그 자리에서 내 걱정인 양 툭 던진 그 말에 너무나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그 자리엔 내게 친정엄마가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더욱이 그랬다.
그 얘길 듣고 굳이 "초희, 엄마 안 계셔?"라고 묻던 다른 언니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한참 어렸던 내가 그런 상황 속에 놓여있었다는 게 안쓰럽게 느껴진다.
당시에 난 흥겹던 술자리를 방해하기 싫어 당혹스러움을 뒤로했다.
늘 그렇듯 나로 인해 불편한 분위기가 되지 않기를 바랐기에.
하지만 그날이 두고두고 기억되는 건 내게 무례한 기억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언니 말 따라 친정엄마 없이 애를 낳고 키우는 게 불가능 그 자체는 아니지만
아이가 클수록 불편함이 커지는 일은 맞기 때문이다.
일하는 엄마로 살기로 결심한 내게는
엄마가 없어 누구보다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없다는 불편이 크다.
게다가 시간이 좀 더 지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주변 도움 없이는 고될 육아의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내 욕심처럼 일도 하고 싶고 아이도 돌봐야 하는 내게는 여전히 주변의 누구도 아닌 친정엄마의 부재는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하지만 엄마 없이 사는 현재의 나는 모든 일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친정엄마가 멀리 살아서 도움을 못 받는 분들도 계실 텐데
나 역시 친정엄마가 너무 멀리 계시는 것뿐이라며 나를 다독인다.
내가 주저앉을 포인트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엄마가 없어서 죽을 만큼 힘들었고
그런 나 스스로를 창피해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답도 없는 상황들의 반복이었으며 날 이끌어줄 엄마가 없으니 세상 외로웠다.
꽤 긴 시간을 남모르게 버티고 견디며 앞으로 벌어질 상황들을 상상하고 대비하는 방법을 찾았야 했다.
엄마 없는 모든 시간 이 방법은 내 극복에 최선이었다.
결국은 내가 극복하려 애썼던 시간들은 온전한 '나'자신이 되었다.
보통의 모녀를 본다 해도 엄마와 나를 겹쳐보지 않고,
엄마의 기일이 되어도 슬픔 마음만으로 엄마를 추억하지 않는 힘.
엄마의 생일이 되어도 못다 한 마음이 아쉽지 않게 지나 보낸다.
지금이 너무 힘들어 이 글을 찾은 분들도
나의 상황에 놓인 여럿 딸들이 견뎌온 것처럼 어려움을 극복할 자신만의 방법이 생길 것이다.
나와 같은 시간을 지낸 분들도 온전히 이 상황을 극복한 방법들과 노력들이 있을 것이다.
노력 없이 극복될 시간은 분명 아니기에.
그리고 나처럼 긴 시간을 극복하고
온전한 나로서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은 지금의 내가 느끼는 감정을 공감해주시리라 생각한다
누구보다 빠른 이별을 겪고 나니 아이러니하게도 난 모든 순간 씩씩해져 버렸다.
여전히 어떤 순간은 당황하고 얼굴을 붉히지만 금세 회복한다.
감정 소모로 보냈던 긴 시간을 뒤로하니
되려 상황을 바르게 판단하는 냉철함도 생겼다.
엄마가 안 계신다고 말하면 무거워지던 분위기를 더 이상 피하지 않는다.
'전 엄마가 돌아가셔서요.'
'친정엄마가 안 계셔서 아이를 제가 봐야 해서요.'라는 말을 하는 게 내게서 쉽게 나오니
듣는 사람들도 전처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엄마 없는 삶을 사는 현재
난 어떤 일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높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현재의 모습이 참 좋아 자존감 역시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