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두어 번, 남편과 아이가 없는 자유여행의 기회가 찾아온다.
올해는 그 ‘자유’ 여행을 아이와 두 번 함께했기에 마지막 자유여행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시간으로 정했다.
혼자 떠난 공주 1박 2일 여행.
평소에도 드라이브와 여행을 즐겨 하지만 남편과 아이가 없는 이번 여행은 유독 더 고요했다.
성격 탓일까, 장녀여서일까. 누군가와 함께라면 작은 것 하나도 늘 배려해야 하는 내가 혼자 있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되는 듯했다. 숨 쉬는 것조차 평소와는 다른 기분. 혼자 떠난 여행은, 그 이름 그대로 ‘자유’였다.
공주 KTX역에서 관광지까지 가는 버스는 한 대뿐이라고 들었다. 네이버 지도에도 배차 시간이 나오지 않아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히 공주 KTX역은 종점이라 역 앞에 버스가 바로 대기하고 있었다. 막상 타보니 정차역이 많지 않아 30분 남짓이면 관광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창밖으로 스치는 시골 풍경과 가끔 풍겨오는 소똥 냄새,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가 마음을 채웠다.
오늘은 나 홀로 공주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둘째 날의 기록을 남겨보려 한다.
둘째 날, 첫날에 일정을 타이트하게 소화했던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날은 기차 시간이 여유로웠다.
특별한 계획 없이 길을 걷다가 전날 *고마열차에서 들었던 황새바위 순교성지를 마주쳐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날씨와 잘 가꾸어진 성지의 풍경이 초입부터 예쁘게 어우러져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세례도 받고 첫 영성체까지 했지만 믿음이 깊었던 엄마가 돌아가신 뒤 우리 가족은
냉담을 넘어 무교에 가까워졌다. 종교와는 멀어진 삶이었지만 이곳에 서니 이유 모를 평온이 찾아왔다.
천주교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날씨와 풍경 덕분일까.
분명한 건 이곳이 주는 경건함과 평화로움이 좋았다.
지하 무덤경당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겁이 많아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래도 나의 어딘가는 천주교인이긴 하잖아’라며 갑작스러운 합리화한뒤 작은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무덤을 형상화한 돌무덤과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있었다.
나는 순교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공간 한편 작은 예물함이 눈에 들어왔다.
봉투에 생미사, 가정미사, **연미사 중 하나를 체크하고 누구를 위한 기도인지 적어 넣는 예물함이다.
그 순간,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엄마가 생전에 늘 연미사를 원하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교인에게는 단순히 종교라는 기관에 돈을 내는 행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천주교에서 그것은 마음과 기도를 함께 담아 바치는 봉헌이다. 평소 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천주교 추모관에서 예물을 드리곤 했지만 공주의 순교성지에서 만난 예물함은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제발 현금이 있기를!’ 바라며 지갑을 열었고 가방에서 7천 원을 꺼내 봉투에 넣었다.
연미사에 체크한 뒤 엄마의 이름과 세례명을 적어 예물함에 넣었다.
평소보다 적은 금액이라 아무도 모를 스스로의 창피를 느꼈지만 그 마음만은 누구라도 알 것이라고 믿었다.
괜스레 이런 상상도 해봤다.
하늘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놀던 엄마가
"갑자기 나를 위한 기도가 들리네? 그런데 이번엔 추모관이 아니라 공주에서 들리네?" 하며 놀라는 듯한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니 '평소 이런 상상을 하지 않는 내가 무슨 일이람' 싶어 웃음이 나왔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순간부터 황새바위 순교성지의 길을 걸을 때마다 자연스레 엄마가 떠올랐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 살결에 내려앉는 따뜻한 햇살까지, 모든 것이 엄마와 함께 걷는 걸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엔 ‘굳이?’ 싶었던 십자가의 길도 끝내 올랐다. 그곳에서는 야외미사가 한창이었다.
태어나 처음 본 광경이었다. 장례미사 이후로 성당에 나가지 않았던 나에게, 야외미사는 낯설고도 이색적이었다. 관광객처럼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지만, 머릿속에는 잊고 있던 기도문과 성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묘하고도 따뜻한 순간이었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60대.
공주라는 도시는 천천히 걸으며 즐기기에 딱 좋은 곳으로 엄마와 왔더라면 좋았겠다 싶었다.
특히 성당과 기도를 소중히 여기던 분이었으니, 이곳에서의 야외미사를 정말 좋아하셨을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15년. 바쁜 삶 속에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지낼 때도 많은 내게, 이곳에서의 시간은 엄마와 함께한 듯한 특별한 순간이었다.
여행 전 날 아이에게 들은 말이 문득 떠올랐다.
“엄마, 공주 재밌으면 내년 모녀여행에 나도 데려가줘!”
"다똥아, 지금 엄마 글 읽고 있지? 내년에 우리가 공주여행을 가게 된다면 꼭 황새바위 순교성지에 함께 가자.
그곳에 같이 가면 비록 외할머니는 곁에 안 계시지만, 외할머니와 엄마, 다똥이. 이렇게 셋이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따뜻할 것 같아."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우연히 만났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 남을 장소가 되었다.
혼자였지만,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엄마와 함께 걷는 듯해 마음이 풍요로웠다.
짧지만 특별했던 이 공주 여행은 결국, 엄마와 함께 마무리한 여행으로 남았다.
*고마열차 : 공주시 세계유산등재지구와 주요 관광지를 왕복 운행하는 관광 열차
**연미사 : 천주교에서 이미 돌아가신 분을 위해 바치는 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