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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운트레이크 Jun 29. 2023

경험해 보지 않은 시간에 대한 고민

은퇴는 낯선 시간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경험을 해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일에 있어 경험이 쌓이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보통의 경우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경험이 있다는 것만으로 대부분 그렇다. 그래서 모든 일의 첫 관문은 경험이 없는 출발점이다 보니 항상 기대반 걱정반으로 시작된다.


어머니품을 떠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나를 둘러싼 그 낯선 세계가 기억나는가? 대학에 입학한 직후 처음 들이마시는 최루탄 공기와 눈부신 봄날의 햇살들 사이로 느꼈던 원초적 자유가 기억난다. 경험의 시작은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온갖 걱정거리가 동시에 충돌하는 지점이다.


졸업 후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처음 앉았던 내 책상이 기억난다. 1991년 겨울이었다. 한강을 뒤로 창가 쪽 부장님 책상부터 맨 앞 여직원 책상까지 일렬로 배치되어 있던 차가운 회색빛 철제 책상이었다. 여직원보다 늦게 입사했어도 맨 앞이 아닌 여직원 뒤에 앉는 호사도 누렸던 기억이 난다. 이 대열에 합류했다는 안도감과 늘 내 뒤통수를 쳐다보는 선배들 시선이 부담되던 시절이다. 그래도 새로운 경험을 쌓으러 가는 출근길은 매일 천국과 지옥을 오가곤 했어도 뭔가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설렘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입사 얼마 후 결혼식의 기억도 생각난다. 왜 이런 힘든 '결혼식이란 의식을 치러야 할까' 잠깐 생각할 여유도 없이 주어진 공식대로 해치웠다. 남들이, 주변에서 그렇게 생각하니 원하는 방식대로 뻔한 결혼식을 했다. 갑작스러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뜨거운 조명 세례를 받으며 전쟁 같은 신고식을 끝냈다.


숨 돌릴 새 없이 김포공항 국제선으로 달려가 화장실에서 예복을 신혼여행 의상으로 환복 했다. 그날의 아수라장이 생각난다. 그 따뜻한 봄날은 마침 결혼 기일로 국제선 터미널 화장실은 환복을 하려는 신혼부부들로 거대한 탈의실이 되었다. 출근시간 지하철 실내같이 화장실은 꽉 찼다. 환복 하던 신랑들은 즐겁게 각자 비명을 질러댔다.


"자꾸 밀지 마세요", "그거 내 옷입니다", "비행기 시간에 늦었서 급해요!", "나가서 갈아입으시면 안 돼요?"


결혼식도 다시 시작하라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다. '굳이 판에 박은 결혼식이 필요할까?' 경험을 해보니 알겠다. 어쨌든 돌아보니 인생의 첫 순간들, 너무 긴장하거나 걱정할 것도, 너무 기대하거나, 미리 실망할 것도 없었던 순간들이 지나갔다. 그때는 정신없었지만 정말 한 번뿐인 소중한 순간들.. 나름 여러 이정표를 찍으며 지나왔다. 그렇게 남들을 곁눈질하며 따라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쌓은 경험으로 남은 인생 후반기는 더 잘 보낼 수 있을까?'




나는 50대 초반에 빠른 은퇴를 했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은 시간을 앞으로 어떻게 보내야 할까? 경험이 많다는 것은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효과적으로 잘 대비할 수 있는 확률도 높다고 볼 수 있다. 50년 잘 살아온 경험으로 이후의 50년도 잘 살 수 있는 걸까? 정말 그러면 좋겠다.


심리학자들은 실제로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은 개별적이고 인과적 관계가 없다고 한다. 두뇌가 저절로 기억을 어떤 스토리로 만들어내고 인과관계를 지어 낸다고 한다. 과거로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내가 몇 년 전 어떤 부동산에 투자해서 예상보다 이득을 본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은 정확한 분석이나 예측을 통해 이루어진 성공 스토리로 머릿속에 자동으로 기억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많은 선택지 중 왜 그 물건을, 하필 왜 그 시점에 했는지 나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단순히 경험을 복기하고 그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또 투자를 한다면 그 결과의 향방을 알 수 없다. 그 당시 해당 아파트의 브랜드와 입지의 조합이 너무 탐나서 그냥 꽂혔다는 표현이 맞다. 분석은 나중에 내 머릿속 결정을 거꾸로 꽤어 맞춘 거나 다름없었다. 초기에 마이너스 P 등 가격하락으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최종 매도 결과가 좋았다. 


심리적 충동으로 시작했지만 운 좋게 결과가 좋으니 훌륭한 스토리로 남겨 놓는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컨트롤 타워이지만 내 마음 나도 모르고 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인식하곤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모두 그럴까? 사실이다.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우리는 누구나 착각을 가지고 돌아다닌다"라고 말했으니까. 


'그동안의 내가 알고 있는 경험이나 기억은 얼마나 정확할까?'


'퇴사 후 인생 후반전은 그동안 쌓은 경험으로 잘 풀어갈 수 있을까?' 


전반전에 골 넣었다고 후반전에 또 골이 들어간다고 예측할 수 없고 타자가 앞 타석에서 삼진을 먹었다고 다음 타석에서 안타를 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냥 각각의 별개의 이벤트다. 내가 젊을 때부터 갖고 있던 나의 미래에 대한 모습이나 은퇴 후 생활에 대한 생각도 막상 닥치고 보니 지금은 도통 그때 계획이 뭐였는지 지금은 알 수 없게 '뒤죽박죽'되었다. 


사실 긴 회사생활을 퇴사하고 만나는 세상은 기존의 경험치로 풀어갈 일이 많지 않다. '일머리'는 회사 내에서나 작동되던 것들이다. 아빠로서의 역할은 집에서 아이가 어렸을 때나 적용되던 경험이다. 내가 젊을 때 골몰히 생각했던 계획이나 누렸던 감정들이 오히려 미래에는 상상력의 한계를 불러오는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


'26살, 취직해 회사 다니는 아들을 보며 여전히 유치원생 대하듯 훈계하고 있다면..'


그래서 머릿속 1차 생각으로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이제 별로 없다. 그래서 계속 바뀌어야 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계속 생각이 바뀌고 변화해야 한다. 나의 신체 노화도 점점 빨라지고 있으니 그만큼 정신줄을 바짝 잡아당겨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 다른 우주에서 방황할 수 있다.


'경험도 소용없다면 정신줄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노화를 겪는 생물체의 고단함과 외로움과 무기력함을 생각하면, 자신과 배우자에 대해 연민이 샘솟을 것입니다... 결혼생활에 필요한 역량은 연민의 능력입니다."


김영민 교수의 '연민의 주례사'에 나오는 글이다. 경험이 없는 신혼부부에게 미리 주는 중요한 메시지다. 혼잡한 결혼식에서 이 말의 뜻을 이해하고 노후를 상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결혼생활은 노화의 진행 과정이 분명하다. 그러면 인생 후반전의 '연민의 능력'은 필살기같이 꼭 갖추어야 할 최고의 무기임에 틀림없다.


근데 '연민의 능력'.. 이게 뭐지? 이런 표현이 솔직히 나에게는 모호하지만 그럴듯하게 표현된 활자체로만 느껴졌다.


'측은하게 생각하라고? 왜? 나이 들며 서로 싸우지 말라고? 당연한데.'


어제 아내와 창고형 매장인 코스트코에 다녀왔다. 평소에 늘 가던 용인점이 아니라 가본 적 없던 하남점에 다녀왔다.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었다. 같은 회사 매장이지만 매장의 진열이나 동선이 낯설다. 화장실도 몇 번을 두리번거려야 찾을 수 있었다. 새로운 곳에 오니 재미도 있지만 머리를 더 굴리느라 금방 지쳤다. 아내가 말했다.


"당신도 예전 같지 않네.."

"나에 대한 연민의 정인가?"

"뭔 소리? 어쨌든 가던 곳만 갔으면 이런 자극도 없지."


언제부턴가 생각이 바로 연결이 안 되고 자체 버퍼링 시간이 늘어나곤 한다. 생각을 안 하면 상상이라도 해봐야 하는데.. 사실 최근엔 뭘 상상해 본 적도 별로 없다. 시간이 없다. 상상해 보는 시간 대신 인터넷 검색으로 바쁘니까.


검색창에 '경험해보지 않은 시간을 잘 보내려면?' 물어보고 찾아봤다. 여러 글 중에 이런 표현이 눈에 띈다.


'난 경험한 것도 이해가 안 가..'


헉! 그렇다. 경험한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경험 자체가 없는 건 어떻게 대비하나? 역시 미래는 상상력의 영역이 맞다. 생각만 했던 인생 2라운드를 만나보고 있다. 근데 지금까지의 경험만으로 풀기 어렵다. '가족 속의 나'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 많이 상상해 보자. '일상의 루틴'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해 보자. '내가 지금 행복한 순간이 뭐지?' 자꾸 물어보자. 그래서 낯선 시간으로 나를 자꾸 밀어 넣어야 한다. 


어릴 땐 나도 상상력 하나는 참 좋았다. 

'그런 상상력이 정말 고갈되면.. 그게 정신줄 놓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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