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은 변화가 필요해
10월이란 계절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뜨겁고 열정적인 여름과 차갑고 쓸쓸한 겨울 사이를 잇기 때문이다. 10월은 한 해 넘김을 예고하는 낭만의 서막이다. 그런데 직장을 다닐 땐 그런 낭만은 없었다. 10월은 업적 평가 시즌이다. 10월 말로 그해의 성과 평가는 끝난다. 그래서 10월이 오면 한 해가 지나갔음을 시린 마음으로 느꼈다.
'올해 평가는 뭘 받을 수 있을까? B등급 아님 A.. 설마 S?'
지금은 내가 보낸 시간을 남이 평가해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홀연히 마주하는 가을은 오감부터 반응이 다르다. 더 진하다. 오감이 반응하니 시간도 더 빨리 지나간다.
단풍이 더 내려오기 전 아직은 여름의 잔상이 조금은 남아있는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다와 커피의 도시 강릉 그리고 송정 해변을 다녀왔다.
강릉 송정해변은 언제 와도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직장 생활을 하던 20여 년 전 강릉에 몇 달간 출장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점심 식사 후 혼자 송정 해변을 찾곤 했다. 해변 주변을 걸으며 직장 생활의 여러 고민을 정리해 보려 했다. 이 푸른 바다가 걱정을 덜어줄 수 있는지 어디서 읽은 대로 폼나게 모색해 보던 시기였다. 근데 그러면 그럴수록 생각에 집중은 안되고 찬 바람과 파도소리에 멍하기만 했다.
'그땐 뭐가 그리 고민이 많았나?'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다만 분명히 당시 진지했고 심각했는데.. 어느 시점엔 늘 뭔가를 확실히 매듭을 지어 보려는 성향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그랬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사념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 상당 부분 저절로 해결되는 '두리뭉실' 매직을 잘 모를 때다.
당시에는 해안 경계 철조망이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철망 넘어 보이는 바다가 더 운치 있었다. 지금은 카페거리와 함께 유명한 관광 해변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 해무가 잔뜩 끼었던 그 무렵 송정 해변이 더 좋다. 검갈색 철조망 사이로 보이던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은 빛바랜 흑백사진과도 같이 남아 있다.
어쨌든, 추억의 송정 해변을 지나니 신축 아파트 분양 현장이 보인다. 해변 바로 옆까지 아파트가 치고 들어오는구나. 갑자기 제2의 직업병.. 부동산 호기심이 솟는다.
'어떤 곳이 될까? 해변을 보며 여기에 살면 느낌이 어떻게 다를까?'
강릉 송정 해변을 바라보는 오션뷰 아파트다. 하지만 오션뷰와 해변 접근성을 빼면 이곳은 편의 시설과 교통 그리고 학교 접근성도 불편한 곳이다. 실거주 장점보다는 멋진 뷰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프리미엄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오션뷰 희소성이 생명력인 곳인데 일반적인 가성비 투자와는 거리가 멀다.
강원도로 이사 온 후 요즘 매일 집에서 멋진 마운틴뷰를 보며 살고 있다. 그런데 워낙 내가 싫증을 잘 내는 타입일까? 멋진 뷰도 일상이 되면 무감각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오히려 번잡한 도심이 생각날 때가 더 많아진다. '나는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다시 고민하는 가을이 되고 말았다.
직장을 정신없이 다니던 시절.. 이런 바다나 산을 벗 삼아 자연과 함께 하고 싶은 로망에 쫓기곤 했다. 이젠 그게 뭐였을까? 그 로망의 실체가 흐릿해진다. 퇴사하고 시간이 많아지니 멋진 자연도 그 달콤함이 떨어진다. 나는 퇴사하면 '자연에 산다' 이게 강력한 해법 중 하나라 생각했는데 나는 아닌 거 같다.
강릉에 올 때마다 카페를 한 군데씩 찾아가는데 오늘은 남들도 다 가보았다는 강릉 도심 카페를 찾았다. 평일 오후라 한가하고 골목길 고택의 2층 구조라 분위기가 좋았다. 바다가 아니어도 좋다. 아내와 커피 한잔 하며 '마운틴 뷰와 오션 뷰', '바닷가 생활'이 어떨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어떤 것도 그리 감흥이 없다.
'눈에 보이는 자연은 그저 마음의 프레임에 따라 바뀐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기다리던 부동산에서 온 전화였다. 이거다. '새로운 무빙'을 계획하며 운전대를 고쳐 잡았다. 이제 10월도 깊어간다. 분명 목적과 이유는 있다. 그럼에도 이 노매드 기질은 어쩔 수 없나?
아무튼 이 가을 새로운 프로젝트가 필요해..
'남들의 평가는 이제 필요치 않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