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무빙을 준비하며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보니 치악산 비로봉 꼭대기에서 첫눈이 빛나고 있었다. 해발 1,288m 높이의 산꼭대기다. 멀리 보이긴 하지만 분명히 그날 밤 몰래 눈이 내렸다. 날씨가 한동안 초봄같이 '푹푹' 하더니 겨울의 다가옴은 여지없고 변함없다. 이젠 정말 겨울이 오긴 오나 보다.
좀 더 겨울이 돼서 온통 눈 덮인 치악산의 파노라마를 이 집에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음 주엔 여기를 떠나 분당으로 돌아간다. 아쉽다는 표현은 좀 부족하다. '시원 섭섭함'이 더 맞아떨어진다.
'눈부신 마운틴 뷰도 나에게 완전한 충만감을 주진 못한다.'
멋진 뷰가 있는 집에 살면 매일 감동까지는 아니어도 소소한 생활자극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눈으로만 보는 자극이라 그런 걸까. 3개월 정도 지나니 처음의 생소함과 긴장감이 옅어진다. 그냥 일상이 되어 덤덤해진다. 얼마 못 가네. 욕심이 많은 건가?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에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행복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일지 조사한 결과가 있다. 3개월이다.
'그렇구나.. 3개월.'
그럼 3개월마다 행복할 거리를 찾고 또 새롭게 느껴야 한다는 것인데.. 행복은 감정이라 한다. 감정은 아주 미세한 틈만 있어도 물이나 공기처럼 형체 없이 들어왔다 흘러 나간다.
어쨌든 내가 내린 1차 결론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멀리 떨어져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좀 외롭다. 그래서 자꾸 무료한 '틈'들이 생긴다. 그 틈새로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락거린다. 이런 생각들 말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자꾸 물어본다.
어쨌든 내 감정이 충만하지 않고 자꾸 비워진다면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목표로 했던 2년 동안 '강원도 살아보기' 열정은 시들해졌다. 이곳 아파트는 입주해 등기도 마쳤으니 세주고 나가면 된다. 아무리 노매드 기질이라 하지만 6개월 만의 이사라.. 이런 상황이 바보 같다고 느껴질 무렵.. 방향 전환을 확실히 할 수 있는 핑곗거리가 생겼다.
그 전환점은 아들의 진지한 '합가' 선언이었다. 지난 9월 추석연휴 때였다. 아들은 판교에 취직한 이후 3년째 혼자 오피스텔에서 독립해 생활하고 있었다.
"이제 오피스텔에서 혼자 지내는 게 힘들어요.. 다시 합치면 안 될까요?"
"주말에 보면 되지.. 전엔 독립해 좋은 점이 더 많다며."
"퇴근해 빈방에 들어오는 게 싫어요.. 주말마다 여기 오는 것도.."
3년째 떨어져 있던 아들이 그날은 제법 진중했다. 독립 초기의 설렘은 사라졌다. 그는 주말마다 이곳 원주까지 내려와 함께 지내고 일요일 저녁에 다시 올라가곤 했다. 외아들의 특성일까? 우리가 어디에 있든 주말마다 꼭 와서 집밥을 먹고 돌아갔다. 그런 뒷모습을 지켜보는 나와 아내도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애써 이렇게 주장했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면 독립해 살아야지."
이건 미리 고민하고 만들어낸 의도적 '완충장치'였다. 아이가 성인으로 커가며 갈등이 많았다. 부모의 지나친 애정이 간섭이 되어 충돌할 때가 많았다. 서로 아끼고 잘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상대방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대학 심리학 수업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 사랑은 '고슴도치의 가시' 같아서 서로 가까울수록 아픈 것도 모르고 찌르게 된다고 했다. 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의 대학 졸업 무렵부터 취직과 동시에 분가를 적극 지원했었다. 전엔 그랬다. 그런데..
'가족은 동고동락해야 힘이 생길까..'
아내에게 어찌 생각하냐고 물었다. 돌아돈 즉답은,
"Why Not?"
"한국말로 해.."
"가족이 외롭고 힘들면 무조건 합쳐야지 뭘 고민해?"
"그렇지? 그럼 그동안 우린 여기서 뭘 한 걸까?"
아무튼 우리 가족은 다시 뭉쳐 서로 의지하고 응원해 주기로 했다. 다시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이 감돈다. 고슴도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행복하다. 다시 새로운 곳으로 무빙이다.
저 높고 커다란 치악산은 우리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산 위의 정상은 고요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실제로 저곳은 평온할까? 아님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을까?
갑자기 옛 영화 제목이 왜 생각나지.. 폭풍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