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관성 극복하기
이곳은 새 아파트다. 최신 설비도 잘 되어 있다. 주방 아일랜드 상판에는 매립형 충전기와 콘센트가 있어 매우 편하게 잘 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점심에 아내가 시원한 콩국수가 먹고 싶다며 콩국물을 내다가 그만 콩국물 컵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0.1초 만에 짙푸른 콩국물이 매립형 콘센트 구멍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갔다.
"헉, 콘센트로 국물이 쏟아졌다. 어떡해?"
"이런! 일단 빨리 가져와 걸레! 휴지!"
나른하게 서재에 있던 나는 달려들어 급한 데로 닦아냈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곧 냉장고 전원이 나가 버렸다.
"뭐지? 왜 냉장고가 나갔지? 다른 건 다 들어오는데.."
"내가 차단기 점검해 볼게"
주방존의 일부 차단기가 내려가 있었다. 내가 무심코 올렸더니 그 아일랜드 콘센트에서 연기가 '파박' 피어올랐다.
"헉!"
"으악!"
다시 차단기를 정신없이 내리고 아내를 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아내는 멍해 있었다. 나도 순간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잠깐 패닉(?) 상태였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내가 생각 없이 왜 그걸 올렸지?'
무덥고 무료했던 일요일의 점심시간이 난장판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근데 이때 내가 느낀 건 당황스러움 자체보다 낯선 상황에 머릿속 생각 회로가 '급속 냉동' 얼어버리고 작동을 멈춘다는 것이었다. 알아채버린 내 대응 능력 수준이 좀 의심스럽다. 물론 무방비로 있다가 '훅' 얻어맞어 그럴 수 있다. 일단 아내를 진정시키고 생각했다.
'어디에 물어보고 뭘 조치해야 하나?'
결과적으로 조치는 잘 끝났다. 관리사무소 전기 담당자께 도움을 요청해서 연결선을 임시로 끊고 냉장고존 차단기를 정상 작동시켰다. 휴일 당직 근무 중 달려온 젊은 직원이 너무 고마웠다. 이제 문제의 매립 콘센트만 새로 주문해서 설치하면 되었다. 월요일 아내가 AS센터에 전화로 문의를 했다. 간단한 전화였지만 처음 맞닥뜨린 상황을 설명하자니 말이 참 길어진다.
"그거 있잖아요.. 주방 싱크대에서 전기 쓰는 곳.. 거기 뭐가 들어갔는데.. 그게 아니고.."
이제 보면 간단한 상황이었지만 뒷수습까지 아내와 나는 진땀을 흘렸다.
'이게 뭐라고 그랬을까..'
작은 일도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처리할 땐 생각 프로세스가 버벅거리며 '버퍼링'이 생기곤 한다.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나이가 들면 빈도수가 늘고 속도는 늦어진다. 더워서 그런가? 요즘 자주 느낀다. 그래도 지금은 잘 돌아가는 편일 텐데 말이다.
지금부터 15년 전인 2008년 우리 가족은 여름휴가 때 유럽 자동차 여행을 다녀왔다. 10박 11일 자동차로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스위스 그리고 독일을 지나 룩셈부르크를 경유해 파리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자동차 자유 여행을 좋아한다. 이미 2001년~2002년 미국에서 자동차 여행을 많이 다녀서 경험도 많은 편이다.
여행 루트, 숙박 장소 그리고 렌터카 예약 모두 인터넷으로 직접 하고 아내와 아들(당시 초4) 셋이서 돌아다녔다. 틈틈이 준비하는데 3개월 걸렸다. 남들이 다닌 여행기를 미리 살펴보고 여행지 정보와 숙박지를 알아보는 작업은 직장생활에 찌들어있던 나에게 '오아시스 샘물' 같았다. 퇴근하고 주말마다 인터넷을 뒤지던 순간은 잠시나마 나를 생동감 넘치는 '자연인'으로 만들던 프로젝트였다.
퇴사 후 긴 코로나가 끝났다. 15년 만에 다시 해외 자동차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시작한 지 한 2개월 지났다. 그런데 관련 여행 책자와 인터넷을 검색하는데 그때의 설렘과 감정이 잘 생기지 않는다. 집중이 잘 안 되다 보니 여러 생각이 든다. 목적지가 자꾸 바뀐다.
'어라.. 왜 이렇지..'
일단 낯선 목적지를 찾아 자동차를 운전하고 이동하는 것 자체가 이제 '짜릿한 흥분' 보다는 '해본 귀찮음'으로 다가온다. 설렘보다 각종 테러 뉴스나 날씨 등 전보다 잔 걱정거리가 늘었다. 아내에게 말했다.
"이거 저거 걱정되네.. 이번엔 그냥 패키지로 갈까?"
"패키지는 싫은데.. 자유여행 아니면 별로야.."
"우리가 예전처럼 운전할 수 있을까? 중간에 체력이 훅 가는 거 아냐?"
"몸보다 당신 마음이 예전과 다른 거 같은데.."
맞다. 계획을 세우다 그만 머리가 고생만 하고 진도가 안 나가는 '버퍼링' 상태다. 이러다 자칫 그냥 내려놓게 된다. 어느새 편안함과 익숙함으로 자동 수렴하려는 심리적 관성에 의도적으로 저항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해진 정규 교육을 마치고 한 가지 직업을 유지하다 은퇴하면 그냥 쉬고 싶어 진다. 이런 프로세스는 다양한 자극에 점점 더 취약해지고 노후에 치매에 걸리기 쉬울 수 있다. 서울아산병원의 노년내과 정희원교수 언론 인터뷰가 생각난다.
"청소년 때만 몰입하는 입시 제도가 문제다. 그 후 머리도 몸도 쓰지 않으면 '뇌 근력'을 잃어버린다. 정보 수집, 분석등 머리 고생하는 직업인의 치매 발생률이 그나마 현저히 낮은 이유다."
그는 나이 들어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는 '몸 고생'과 '머리 고생'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내가 이 기사를 스크랩하여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봐 몸 고생, 머리 고생 즐겁게 한큐에 하려면.. 뭐가 좋을까?"
"해외 자동차 여행.."
다시 낯선 목적지의 여행서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버퍼링'이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