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오컬트 영화에서 자주 들어본 대사다. 숨어있는 악마에게 끈질기게 묻는 것은 이름이고 정체였다. 성수를 뿌리고 기도문을 읽으며 괴롭히다가 결국, 그 악마의 이름을 알아낸 후에야 쫓아낼 수가 있다.
이것이 시를 쓰기 시작한 이유다. 이름을 찾아주는 것. 내 안에 숨은 공포를 시로 쓰자. 내가 느끼는 공포를 알고 구체화하고 이름을 붙여주자. 그렇게 나의 공포는 시의 제목이 되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건지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에 짓눌려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웃지 않았다.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나의 말이 아니었다. 나에게 나는 너무 형편없는 인간이었고,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면 모두가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스치듯 문구 하나를 보았다.
만나야 헤어질 수 있다.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공포를 시로 쓰자 마음먹고, 리스트를 만들었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을 적기 시작했다. 열 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리스트가 점점 길어졌다. 감정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지고 이유가 생기고 이름이 붙었다.
이름이 붙자, 공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내 공간에 들어온 낯선 사람이 두렵지만, 누군지 알게 되고 인사를 하고 왜 왔는지 알게 되면, 함께 시간을 보내고 배웅할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시를 한 편 쓰는 동안, 나는 두려움을 만나고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수 있었다. 그제야 길고 긴 리스트의 한 줄을 지울 수 있었다.
내 공포 리스트는 여전히 채 지우지 못한 제목이 있다. 아직 이름 지어주지 못한 두려움이 나를 노려볼 때도 있다. 하지만 리스트의 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지금은 시를 쓰지 않는다. 두려움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난 여전히 나를 믿지 않고, 타인을 믿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분노할 때도 있다.
대신 웃음의 이름을 찾고 있다. 내 안에 남은 긍정의 이름, 희망의 이름, 편안함을 느끼는 이 감정의 이름을 찾고 있다. 그 이름을 찾기 위해 에세이를 쓴다. 공포의 리스트를 만들어 지웠던 것과 반대로 아직 짧은 웃음 리스트는 계속 추가해 나가려 한다.
영화를 다시 떠올려보자. 악마에 씐 나약한 인간은 흉측하고 혐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들추지 말라고, 내버려 두라고 보기 싫은 모습으로 외면하고 싶게 만든다. 외면하고 싶은 나에게 다가가야 한다. 들여다보고, 물어야 한다.
“너는 누구니? 이름이 뭐야?“
행복은 나와 만나야 찾을 수 있다. 공포를 만나 이름을 지어주어야 버릴 수 있다. 나를 웃게 하는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 꽉 잡을 수 있다. 그때 행복이 내 곁에 조금 가까이 다가와 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