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를 건너 모퉁이를 돌자, 한옥마을의 입구였다. 점심을 먹고 나온 직장인들과 외국인들이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한옥마을 마당에 들어서는데, 남산타워가 작게 보였다. 작지만 남산타워를 보자, 내가 서울에 온 게 실감 났다.
며칠 전 대학 친구는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나들이나 하자는 연락을 해 왔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 코스는 남산이었다.
남산 한옥마을을 천천히 걸으며 우리는 지난 이야기를 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 장례식 이야기 같은 그동안 있었던 사소한 대화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거리를 좁혀나갔다. 그러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었다.
“와! 이 향기 뭐냐? 라일락 향기가 이렇게 멀리까지 오는 거야?”
“향기 너무 좋다. 그치?”
멀찌감치 떨어진 라일락 나무에서 날아온 꽃향기에 우리는 금세 웃어버렸다. 작은 나무 한 그루였고 멀리 있었지만, 라일락의 꽃향기는 또렷했다.
자연스레 우리 대화는 봄으로 향했다. 산책로는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가는 햇빛과 바람으로 가득했다.
“나들이는 봄이 제일 좋아.”
“나도. 너무 덥지도 않고, 꽃도 예쁘고.”
“좋은 계절에 태어났어.”
문득 생각했다. 봄에 태어났지만 결국 벚꽃이 질 때 태어난 거리고. 그리고 지금 나는 천천히 꽃잎을 떨구는 시절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운 건, 벚꽃이 진 자리에 알알이 맺히는 버찌 열매가 나에겐 없다는 것이다. 가끔은 내가 민들레조차도 못 된 들풀 같기만 했다.
나무로 깔아놓은 산책로에서 나오자,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조금 더 걸어 올라가자, 아주 커다란 건물이 나왔다. 국립극장이었다.
순식간에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은 것만 같았다. 우리는 무인 매점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서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다시 공부한다면 미학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왜 그때는 미학 수업을 대충 들었을까?”
우리는 지나간 날들에 대해서 떠들었다.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책을 읽고, 팔각정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했던 사소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난 진짜 내가 시를 좋아하게 될 줄 몰랐어. 그때는 시 수업 시간이 제일 싫었는데.”
그때 건물 안에서 타악기를 두드리며 공연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습하나 봐. 멋있다.”
우리는 야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 현업이 아닌 채 예술을 좋아한다는 게 얼마나 덧없는지, 마음을 헛헛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어느새 교수님이 말하던 고급 독자가 되어 있었다. 그 말은 아주 슬픈 체념 같기만 했다. 대화는 즐거웠지만 지는 꽃이 아쉽듯, 돌아갈 수 없는 날들에 대한 쓸쓸함도 있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남산타워까지 가 보자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라일락 향기가 훅하고 다가왔다. 둘러보니 해오름극장 옆, 라일락 나무에 하얀 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라일락 나무는 멀리 있었다. 꽃의 모양은 보이지도 않았다. 키도 작고 화려하지도 않은 흰색이었다. 게다가 가까이서 코를 대지 않았는데, 향기가 바로 내 곁에 있었다. 그 향기는 또다시 미소 짓게 했다.
이게 무슨 꽃이지? 고민할 필요도,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건 너무나 확연하게 라일락 꽃향기였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꽃을 피우면 되지 않을까? 나만의 명확한 향기가 있다면, 바람결에 누군가에게 닿아 미소를 짓게 할 것이다. 산을 꽉 채울 듯 화려하게 피었다가 화려하게 지는 벚꽃은 갖지 못한, 라일락의 꽃향기처럼.
우리는 국립극장에서 나와 남산타워로 가는 버스를 탔다. 외국인들이 가득한 버스 안에서, 스쳐가는 수많은 봄꽃을 보았다. 새순이 빼곡한 봄의 나무를 보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이 버스 창으로 지나갔다. 버스에서 내려 팔각정이 있는 언덕을 올라가다가 돌아보았다.
단 하나만으로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우러져 봄이 아름다웠다. 그 위로 햇살이 반짝였다. 보이지 않는 향기가 봄볕에 날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