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10월의 산문, 두번째 이야기
내게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나는 단언코 거절했을 것이다. 지금 뿐만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에도 나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한때는 죽고 싶었을만큼, 어떻게 죽어야 고통없이 빨리 사라질 수 있을지 고민했던 괴로운 시간이 내게도 있었으니까. 만약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않을 그 순간을 다시 살아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죽어도 과거로 돌아가기는 싫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 생각을 뒤집은 단 한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 함께한 순간은 내게 너무나 달콤해서, 그를 보지 못하는 시간의 괴로운 현실따위 아무렇지도 않은. 아니 사실 너무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글쎄,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어떠했든 그것과 별개로 나는 그를 꽤나 많이 좋아했다.
사람이 가진 불완전함, 그에게서 그걸 보지 못하던 시기도 있었고 그게 보이자 애써 아니길 바라며 부정하던 시간도 있었다. 결국 마음이 줄어가던 그때는 그를 보는 나의 시선에서 온전함보다 불완전함의 영역이 더욱 커져갔다. 그건 내 의지와 힘으로 막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타지에서 만나 짧은 시간 친하게 지냈던 이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내용만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자신은 짝사랑하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며 거리를 두고 지내는게 훨씬 좋다고, 다가갈수록 상대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깨질까봐 무섭다고. 그래서 다가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 그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환상...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환상, 곧 깨져버릴 환상, 즉 착각이라면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게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알기에 그 상자를 열지 않겠다는 마음이라.. 어떤 마음인지 대충은 알겠으나, 나는 그게 사랑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두어달도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그 말을 아주 담담히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려운 삶을 대지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려면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 크고 작은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을 맞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순간이 필요하다. 순수한 웃음을 주는 존재, 설렘을 주고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존재, 그게 필요하다. 그 존재의 진실된 면이 어떻든 그건 중요하지 않고 일단 나를 살아가게 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존재가 필요한 순간, 그러니까 오히려 그 존재의 진실된 면을 보지 않는 편이 나은 순간이 존재한다. 그렇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를 만나기 전, 그 시기에 나는 참 심심했다. 지루했다. 아주 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늘 갈망해오고 그 결핍을 벗어나고자 달려오던 삶에 잠시 여유가 생긴 순간이었다. 사랑으로 채우면 딱 좋을 시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꽤나 노력했다. 생전 안하던 화장도 해보고 피부관리도 꾸준히 하기 시작했으며 운동도 열심히 하며 그 나이에 맞게 생기있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잘난 척도 하고 싶었지만 딱히 잘난 게 없어 하지는 못했다. 그나마 자신 있는 게 잡지식이라, 그가 번개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인줄도 모르고 번개에 대해 공부해온 내용을 설명하곤 했다. 그런 마냥 웃을수만은 없던 해프닝이 많았다. 올해 여름을 그렇게 보냈다.
가을이 오고, 나의 짝사랑은 더욱 짙어질거라 생각했다. 뜨거운 열기가 지나고 찾아온 선선한 바람처럼, 내 마음도 그리 식어갈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 꺽여버린 여름의 더위처럼, 나의 마음은 더이상 달아오르지 못했다.
2024.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