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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미리 Dec 20. 2021

 나목(裸木), 순백의 옷을 입혀주다

  나목(裸木)          


 하늘에서 눈을 내려보냈다. 이 겨울,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연민을 느꼈을까. 그리하여 따스하게 품어주고 싶었을까. 아니면 포근하게 덮어주고 싶었을까. 온통 하얗다. 벌거벗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던 나목에도 순백의 옷을 입혀주었다. 메마른 가슴에도 청춘의 한때처럼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곧 해가 떠오르면 서서히 녹아 사라져 버릴 것을 알기에 더욱 애틋해 보인다.   

  

  만연사 대웅전 앞, 나목이 되어버린 배롱나무에도 하늘의 손길이 닿았다. 나무에 걸려 쓸쓸함만 가득 품었던 연등이었는데 하얗게 순백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만연산은 병풍처럼 한 폭의 아름다운 설경화를 펼쳐놓고 메마른 길손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다. 해가 떠오르고 햇살에 반짝이는 순백의 눈이 바람에 휘날린다. 풍경소리 은은하게 가슴으로 파고든다.     


  대부분의 첫눈은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가버리기에 눈이 온 것을 미처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겨울이 조금 깊어지고 함박눈이 내릴 때 눈꽃을 보면서 순백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한때는 저 순백의 눈을 바라보면 가슴 한쪽이 애절하던 때가 있었다. 아무리 많은 눈이 덮여도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처럼 푸르렀던 때. 덮인 눈에 누렇게 변색된 이파리처럼 숨이 옥죄어 오는데 잿빛 하늘은 눈치도 없이 첫눈을 내려보냈다. 그리하여 얼마 동안 첫눈을 생각하면 애절했다.     


  잿빛 하늘처럼 내 몸에 먹구름이 끼어들었다. 사형선고처럼 내려진 병명을 품에 안고 차창 너머로 휘날리는 눈발을 바라볼 뿐이었다. 크게 절망하지 않았으나 병의 무게에 휘둘렸다. 휘청거리다가 놓아야 할 것들을 놓지 못했고,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뗏목을 등에 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물에 남겨두지 못한 뗏목만큼이나 고단한 삶이 발목을 잡았다.     


  눈을 뜨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처럼 영혼 없이 살았다. 늘 잠꼬대를 달고 살았고, 발을 땅에 디뎠으나 허약해진 몸과 마음이 허공에 떠 있었다. 알프레드 하우스먼의 ‘진주나 루비는 다 주어도 네 마음만은 주지 말라’는 스물하나를 넘기는 일은 가혹했다. 병마에 마음을 주었으니 쉽지 않았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홀로 무게를 간직한 채 일 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긴 어둠을 뚫고 나오듯 터널을 빠져나왔으나 오랫동안 가슴에서 망치질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모래사장 위에 남겨진 새의 발자국처럼 선명한 상흔이었으나 되돌아온 대답은 신경성이란 무책임한 단어뿐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날씨가 추워지면 더 심하게 가슴을 내리쳤다.     


  때론 모른 척 외면했다. 깊이 묻어두었다고 생각했으나 가끔씩 지각변동을 하듯 흔들릴 때가 있다. 의례적이고 반복적인 질문에 무덤덤해지지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의 찌꺼기들은 혼자만의 것이다. 두레박으로 퍼내어도 퍼내어도 줄어들지 않는 우물처럼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어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어둠처럼 스멀스멀.      


  눈이 쌓여 덮이고 덮인 시간들이 세월의 덮개가 되어 순백의 아름다움이 되었을 때 첫눈의 애절함도 서서히 잊혔으나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방황에 내 젊은 날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오기로 버틴 세월이었다. 이제는 주름살만 가득 남아 뒤돌아보면 나목처럼 헐벗은 내가 있다. 오늘처럼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순백의 옷 한 벌이 그저 감사하다. 곧 녹아 없어져 버릴지라도 이 순간이 황홀하다.      


 잎이 다 떨어져 나가고 앙상하게 남아 순백을 덮고 있는 나무를 바라본다. 저 나무에서는 무성하게 잎을 가득 매달고 있었을 활엽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목으로 설 수 있을 때만이 순백의 눈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대웅전 앞 배롱나무가 하얀 연꽃을 피워낼 수 있는 것도 나목이어서 가능한 것이리라.     


  하얗게 쌓인 눈 위를 탑돌이 하듯 걸어본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오로지 내 발자국만을 받아들이는 눈. 뽀드득뽀드득 깊지도 않게 적당히 발자국을 남긴다. 선명하지만 곧 녹아 사라질 내 발자국처럼 영원한 것들은 찾기 힘들다. 살아온 세월이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얼마나 더 비워내야 오래된 기억을 퍼 올리지 않아도 살아질까. 텅 빈 우물처럼 나를 말려 온전히 인정하면 받아들여질까. 어쩌면 퍼낼 물이 남아있다는 것이겠지. 아직은 멀었다. 순백의 눈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나목이 되기까지는 먼 길이다.      


  바람이 분다. 배롱나무 연등 위에 쌓인 눈발이 조금씩 휘날린다. 바람 따라 흔적 없이 사라질 저 눈발은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늘은 순백의 눈을 땅으로 내려보내고 아무것도 모른 척 시퍼렇게 굳어 있다. 구름 한 점 용납할 수 없는 신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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