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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꽃향기 Oct 31. 2022

47세 싱글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47세 싱글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좌충우돌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직장을 거치면서 나는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삶을 살아왔다. 어떤 때는 더 내려갈 바닥은 이게 끝이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을 여지없이 깨주는 무수한 사건들을 지나왔다. ‘이게 마지막 바닥일거야’ 생각하면, 지하 2층, 지하 3층 끝없이 지하로 파고 내려가는 사건의 연속들이었다. 그래도 어찌 보면 순탄하게 큰 빚을 지거나 큰 사기를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사람의 인생은 각자의 삶의 무게로 짓눌리는 것은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리 여유롭지 않은 서민의 생활을 해왔기에 비싼 것 사지 않고 절약하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20대때 회사를 출퇴근하기 위해 정장 구두를 하나 사려는데 그렇지 않아도 저렴한 동대문 도매 시장을 끊임없이 돌아봤음에도 결국에는 더 싼 신발을 찾지 못해 그냥 돌아오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사회 생활 첫 월급 100만원 중 70만원은 지방의 본가로 보내고 20만원은 서울살이 신세를 지고 있던 이모댁의 월세로 드린 후에 나머지 10만원으로 교통비/식사비/기타 비용들을 충당하며 살기도 했다. 물론 1998년 20년도 더 된 시대이긴 하지만, 지금 돌아봐도 지독한 짠순이 생활을 한 건 맞다. 

그렇게 알뜰살뜰 돈을 저축해 6000만원으로 첫 전세집을 방배동에 얻게 된다. 

이 집을 얻은 것은 회사가 강남구 삼성동이어서 출퇴근 시간과 거리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 강서구 등촌동과 성남시 분당구의 자그마한 아파트 전세를 거쳐 나는 내 생애 최초의 내집 마련을 하게 된다. 2억 조금 넘는 가격의 34평 아파트… 

그런데, 그 때 나의 생각은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궂이 서울이나 경기도권에 있어야 하나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충남 지역에 부모님과 함께 살 아파트를 산 것이다. 이것이 내 인생일대의 실수가 될 줄은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분당에서 나는 4년 정도 살았는데, 동네 공원이나 카페가 많아서 자유로운 프리랜서였던 나는 평일 낮에 동네 산책 한 바퀴하고 단골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하는 여유를 즐기곤 했다.

그때마다 느낀 것은 분당에는 평일 낮에 카페에 오는 사람들로 주로 직장 생활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들이 많았는데, 그 분들은 만나면 무조건 아파트 값이 어떻게 되고, 어찌하면 오를 수 있고, 모 이런 주제들로 주로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소음의 공간에서 궂이 저렇게까지 아파트 값에 목매야 하나 생각하며 그들을 마치 속물처럼 간주했다. 그렇지만, 분당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때 내 생각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한다. 분당권은 강남이나 서초구와 가깝고 판교라는 신도시권도 새로 개발되어 앞으로도 떨어지지 않고 발전할 곳이었기 때문에, 내가 이사를 가고 1년 만에 2억짜리 아파트가 3억이 되고, 5년 만에 아파트 값이 2-3배나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난 충남으로 이사할 때까지만 해도 충남에서는 발전하고 주택값이 오를 만한 곳이 세종시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정말 맞았지만, 그 때는 실천력이 많이 부족했고, 너무 내 자신이 호기로웠다. 


5년이 지난 지금 내가 가진 아파트만 가격이 안 오르고, 강원도, 제주도에 이르는 우리 나라의 모든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오르는 것을 보니, 나는 5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점점 가난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내가 일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진 아파트에 직접 살면서 편한 생활을 하긴 했지만, 자산 상승과 물가 상승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코로나 사태 발생 이후에 지방에 살고 있던 나는 어디 외부 지역으로 시외 버스 타고 나가는 일까지도 제한하며 한정된 삶을 살고 있었고, 많이 우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지만, 어디서는 이 위기를 자신만의 기회로 만들어 또 다른 새로운 부자들이 탄생하고 있었고, 그렇게 또 돈은 새롭게 이동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코로나만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기회를 찾고, 실행을 하고, 뛰고 있었던 것이다. 1년을 지나 2년을 향해 가고 있는 이 팬데믹 상황에서 나는 무언가를 하고 변화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하게 된다.

아니면, 내가 점점 우울해져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상처를 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생체기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다시 서울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다시 제로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가장 월세가 싼 서울 집으로 오게 되었다. 


집이 좋고 나쁨을 떠나 내가 다시 도움닿기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했다. 부모님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세상에서 나 홀로 서보기를 다시 해야 했다.

지방에 있는 집에 자산이 묶여있는 상황에서 나는 월세 보증금도 여유롭지 않았다. 500만원 , 1000만원이라는 최소 금액은 있어야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아, 보증금이 거의 없거나 상당히 낮은 집을 선택해야 했는데, 마침 서울에 있는 원룸들이 코로나로 인한 직격탄으로 많이 비워지게 되었고, 나는 이로 인해 보증금이 거의 없는 원룸을 얻을 수 있었다.

전기비를 제외하고, 난방비, 가스비, TV, 인터넷 등의 관리비가 모두 월세에 포함되어 있어서 부담도 덜했다.  

안내던 월세를 내는 삶을 살게 되다 보니, 그동안 슬럼프에 빠져서 하지 않던 프리랜서 일을 꾸준히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바로 마이너스가 나는 생활을 해야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관리하고 추스리게 된 것이다.

현재는 오히려 그 동안 하지 않던 적금과 투자로 한달 평균 월급의 절반가량을 꾸준히 쌓아가고 있다. 이것도 이전 몇 년간은 하지 않았던 습관이 새로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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