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
갑자기 많아진 작업 스케줄로 가까운 공원 산책조차 나에게 사치가 되버린 요즘… 그동안 돈도 아낄 겸 코로나 시기에 마스크를 벗고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이 부담스러워 한동안 집밥만 먹는 삶의 반복…
요즘 들어, 툭하면 어디 부딪히거나 넘어져서 다치기 일쑤였다. 그러다 몇일전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완전 대자로 넘어져 버렸고, 계단 옆에 나란히 줄 서 있던 화분에 귀 뒤쪽을 세게 부딪혔다. 부딪힌 부위는 금새 부어 올랐고, 집에 들어와 보니 무릎도 까져서 피가 나 있었다. 이렇게 다쳤는데도 그 다음 작업 마감 일정이 계속 있어서 정형외과 병원에 이틀 뒤에나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다행히 머리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3일치 약을 지어 와서 집에서 먹고 있는데, 갑자기 내 자신이 서글퍼진다. 돈 아낀다고 한 동안 6-7천원 넘는 밥 한번 안사먹고 버텼는데, 갑자기 허해진 몸에 감기 기운도 있는 것 같고… 일만 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려버리겠다 싶었다. 오랜만에 동네의 오래된 삼계탕집에 가서 만원짜리 반계탕을 먹었다. 일도 장기 마라톤처럼 생각하고 뛰어야지 단기처럼 한꺼번에 힘을 쏟아붓고 나가떨어지면 누가 보상하겠는가? 내가 그동안 조금은 미련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구나 싶다.
한때, 일이 전부인 양 다 쏟아 부어서 일할 때가 있었다. 그러다, 위염도 생기고, 스트레스로 성격도 변하고 말도 아니었다. 그렇게 다 쏟아 붓는다고 해서 회사가 평생 직장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닌데, 그 때 나는 순진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평생 직장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일을 안하면 통장은 마이너스를 향해 달리고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원하는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몇 개월 쉴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는 프리랜서의 삶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나는 주로 한 번역 업체와 일하고 있는데, 이 회사는 미국에 본사를 둔 번역업계 글로벌 매출 1위 기업이어서 일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다만, 이 회사는 다른 회사와 다른 독특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데, 바로 번역작업 경매(Bidding) 시스템이다. 즉, 작업의 분량과 마감일정, 예산이 정해지면 이를 공동의 서버 시스템에 올리고 여러 번역자에게 해당 공지를 보낸다. 그러면, 그 공지 메일을 받은 번역자들이 원하는 납품 일자와 원하는 작업 가격을 올려서 이 중 가장 경쟁력 있는 가격과 납품 일자를 프로젝트 관리자가 선택하고 작업을 할당하는 시스템이다. 처음 이 시스템을 접하고 나는 번역자의 품질과 역량, 경력과는 상관없는 이런 방식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쩌겠는가? 고객사가 원하는 방식으로 맞춰주지 않는 한, 나에게는 작업이 할당되지 않는 것을…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가격과 주말을 뺀 넉넉한 작업 일자를 제시했더니, 내 제안이 모두 거절되었다. 일이 없어 놀게 되는 것이다. 고객사가 제시하는 가격과 일정은 너무나도 타이트하고 불합리적이었지만, 그런 작업들도 시스템에 올라오는 대로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즉, 낮은 가격과 긴급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도처에 있는 번역자들이 해당 작업을 목매며 기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이 시스템이 참 묘한 것이 작업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가 내가 놓친 작업들이 다른 번역 프리랜서들에게 할당되는 걸 보면 묘한 경쟁의식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어떤 혹독한 조건의 작업이라도 우선 내가 맡아서 작업을 할당받는게 최우선이 된다. 그런 경쟁심리를 노린 것이기도 하리다.
참 재밌는 것은 그렇게 경쟁을 시켜서 최저가로 작업을 시키면서 1년에 한 번씩 연말 선물을 보내주는 혜택이 있다. 작업량을 많이 소화한 사람일수록 더 높은 가격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작업자 범주에 포함되어, 누구는 100달러짜리 선물을 고를 수 있고, 누구는 200달러짜리 선물을 고를 수 있다. 그렇게 장만한 태블릿과 고가의 무선 스피커들은 잘 쓰고 있지만, 내가 왠지 고객사의 채찍과 당근 정책에 말린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고객사는 내가 프리랜서로 등록되어 있는 여러 글로벌 번역업체 중 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유일하게 거래하고 있는 곳이다. 인수합병을 통해 다른 곳과는 비교가 안되는 규모로 성장했고, 앞으로도 전망이 밝은 곳이다. 조금은 얄밉지만, 그래도 계속 성장하여 꾸준하게 안정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리 전망이 좋은 직업 분야라도 자동화와 무인화를 통해 언제 그 직업군이 사라질지 모르는 요즘에 나는 내가 일하고 있는 분야가 언제까지 장밋빛 전망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 자신이 끊임없이 맟춰야 하는 품질과 납기일 제한을 건강과 상관없이 지켜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한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 화면과 키보드를 통해 전쟁을 치르듯 작업하는 일상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작은 보람도 느끼고 있지만, 그 보람이 단순히 돈벌이를 위한 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 들어 부쩍 약해진 몸(물론 나이로 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은 조바심과 조급함을 더하게 만든다. 헛 손질과 헛 발질로 자꾸 다치고, 눈도 노안이 와서 가끔은 돋보기가 필요해졌다. 내 책상에는 안과약, 정형외과약, 피부과약 등 온갖 약들의 전시장이 되어 내 몸은 종합병원의 축소판이 된 듯하다. 단순히, 일시적인 면역력 저하의 현상일까? 아니면, 장기적으로 보고 계속 버텨야 하는 것일까?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