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 가는 길 1
푸른 산봉우리에 사는데 家住碧山岑
전해오는 거문고가 있네 從來有寶琴
한 곡 연주야 무방하나 不放彈一曲
알아들을 사람이 없네 祗是少知音
이자현, <도를 즐기는 노래樂道吟>
부귀공명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득바득 살아가는 것도 신성한 장소에서 손 모으는 것도 마음속 신에게 고하는 무수한 발원도 결국 한마디로 말해보자면 바로 부귀공명.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 않은가. 그러기에 사람들이 추구하고 집착하는 그것을 다 버리고 산속에서 도를 즐긴 이자현(1061∼1125)이 자기 마음을 남들은 알지 못하리라 읊조리지 않았을까.
『청구풍아(靑丘風雅)』를 손 가는 대로 넘기다가 이자현이 도를 즐기는 노래에 멈추었다. 그의 노래를 음미하자 그가 살던 청평사에 처음 발걸음 한 지난 봄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래전 어느 겨울 춘천 땅에 처음 발을 내디딘 날 무작정 버스를 타고 청평댐 선착장으로 갔을 때 마지막 배가 떠나고 없던 물가도. 춘천에서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청평사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어서인지 막연하게 이 세상과 유리된 딴 세상으로 생각했으니 그날 물가에서 나는 바람맞은 사람처럼 외로웠다.
시간이 흐른 뒤 수양버들이 점점 연두로 물드는 사월. 마침내 선착장에 내려 청평사로 올라가는 길에 춘천의 뜻처럼 봄내가 내는 소리를 듣고 나는 울었다. 청평교를 지나 산길을 돌고 돌아 청평사 회전문에 이를 때까지. 뒤돌아보아도 아무도 없고 내다보아도 아무도 없어 마음 놓고 흐느끼다가 왜 눈물이 나지? 길 위에서 나는 물었고. 너무 좋아서. 물소리가 좋아서. 나는 또 대답했고.
이자현이 쓴 시를 음미하니 청평사만이 아니라 그의 유적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지난봄 청평사 대웅전에서 삼배를 하고 나와 신발을 신고 있을 때 “안녕하세요. 문화해설사입니다. 설명해드릴까요?” 하면서 다가온 해설사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절 아래 문화해설사의 집으로 같이 걸어 내려와 그 앞의 네모난 영지(影池)에서 그는 못 이름에 ‘그림자 영(影)’자가 들어가는 이유는 이자현이 수도한 견성암이 못에 비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여름이 되면 절 뒤로 견성암이 있던 방향으로 한 번 올라가 보라고. 정말 좋다고.
그 말이 한겨울에야 생각났다. 어떤 말은 그렇게 늦게 도착한다. 여름도 가을도 지나간 뒤에. 봄내 춘천을 이루는 한 줄기 물은 청평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리라. 그 계곡의 물소리를 겨울에도 들을 수 있을까. 경춘선을 타고서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기차에는 언제나처럼 앉은 좌석 앞에 KTX매거진 한 권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펼치자 공교롭게도 청평사를 소개한 기사가 실려 있는 게 아닌가.
“춘천에서 만난 누군가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춘천은 우리말로 ‘봄내’라 하는데, 실은 겨울이 길고도 추워서 봄을 기다리는 간절함을 투영한 지명이라고. 달리 말하면 춘천이야말로 겨울다운 겨울을 간직한 도시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춘천의 진정한 봄은 겨울인지도.” 그러니까 한겨울인 이 날이 춘천 봄내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봄날이라는 거지. 그러면 나는 봄내를 거슬러 견성암으로 오르며 물의 근원으로, 나의 근원으로 더 다가가 볼 수 있겠구나.
버스 종점 소양댐 정류장에 내리니 배가 출항하기 삼 분 전이었다. 나는 선착장으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입김을 뿜으며. 매표소에 도착한 순간. 떠나려다 뒤돌아보는 사람처럼 바로 출항 준비를 하지 않고 혹시 탈 승객이 없는지 내다보는 선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선원이 배 쪽으로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나를 거기 남겨둔 채 배가 떠나지는 않을 텐데도 나는 곧바로 배에 탈 듯 달려가 저 여기 있어요 하는 말을 손짓으로 하고 숨을 헐떡이며 왕복표를 사고 있었다. 그때 선원이 곁으로 오면서 말했다. “천천히 하세요.”
배려해 주는 한마디에 가쁘게 몰아쉬던 숨은 금방 차분해지고 그렇게 가까스로 배에 올라탔다. 정박한 배는 묶어둔 밧줄을 비로소 풀고 출항하는데 나는 선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바람이 차지 않아 밖에서 소양호에 비치는 겨울 햇살을 바라보았다. 물 위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것 같은 광경을 관람하다가 뿌리가 드러난 산기슭에 눈길이 닿았다. 물살에 깎인 산을 보고 있자니 지난 봄날처럼 또 궁금해졌다. 언제부터 배를 타고 청평사로 건너갔는지.
1973년 소양강댐 준공으로 소양호가 생기는 바람에 유람선을 타야 했다면 이전에는 어떻게 청평사에 갔을까. 전에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표지판을 보니 옛길은 소양강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 백 년, 이 백 년 전에는? 조선 문인들의 유람기에는 청평동(淸平洞)으로 들어가기 위해 산협에 나 있는 잔도를 건넜다는 기록이 보인다. “내려다보면 깊은 못이고 올려다보면 낙석이 있는” 곳에 걸쳐진 잔도가 매우 위태하여 모두 기어서 건넜기 때문에 기어간다는 의미로 포복천(匍匐遷) 또는 부복천(扶服遷)이라 하고 혹은 거의 추락할 것 같다는 의미로 기락각(幾落閣)이라 했다 한다. 기락각을 앞에 두고 “혼이 떨려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데 진흙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라고 한 정약용의 말을 미루어 보면 청평사가 얼마나 험하고 깊숙한 곳에 있었는지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청평사로 가는 길이 이러할지라도 그곳에 가기를 꿈꾼 사람들.
가령 김상헌은 청평사 주인이 떠나간 지 오백 여년 뒤인 1635년(인조 13) 조카 김광환이 춘천 부사로 있을 때 말을 보내 맞이하러 온 덕분에 청평산을 유람하고서 “어찌하면 집 떠나 여기서 살 수 있을까” 하며 연연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았고. 그로부터 육십여 년 뒤 1696년(숙종 22) 김상헌의 증손 김창협은 “한평생을 진락공(眞樂公) 이자현을 사모하다가 오늘에야 이 걸음 하게 되었네” 하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편 이황의 경우 1542(중종 37) 재해를 시찰하는 재상어사(災傷御史)로 임명되어 강원도로 가는 길에 청평산을 지나게 되었지만 공무로 갈 길이 바빠 산문(山門)을 두드리지는 못하고 <청평산을 지나다가(過淸平山有感)>라는 제목으로 시와 시서(詩序)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이황은 이자현에 대한『동국통감』사관의 혹평, 즉 탐욕스럽고 인색하다거나 은사의 명성을 얻으려 했다는 말에 반박하고 그를 사모하는 마음을 드러내었다.
이황이 보기에 이자현은 높이 날아 단번에 천리를 간다는 홍곡(鴻鵠) 같은 인물이었다. 이자현의 집안은 조부 이자연이 세 딸을 문종에게 시집보낸 외척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부귀를 구하고 공경(公卿)이 되기는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웠는데도 영화를 사양하고 지위를 피하기를 더러운 세속에서 매미가 껍질을 벗듯이 홍곡이 만물 위로 날듯이 하여 이 산에서 37년 동안이나 오래 머물렀다.”
그 사이 고려 예종은 두 번이나 예를 갖추어 대궐에 들어오라고 명하였으나 이자현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러 음악을 듣는 걱정을 면하게 하고, 물고기를 보고 물고기의 마음을 알아 강해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이루게 하소서.” 이처럼 사양하는데도 예종은 시를 한 편 내려 이자현을 만나보기를 청했다.
평소 볼 수 있기를 원했는데 願得平生見
날이 갈수록 생각 더하네 思量日漸加
덕 높은 뜻 빼앗지 못하나 高賢志難奪
내 간절한 마음 어이하리 其奈予心何
이자현은 표문을 올려 사양했으나 예종의 간절한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마침내 한 번 나아가서 뵈니 예종은 “덕이 높은 어른을 여러 해 동안 사모했는데, 신하의 예로 만나서는 안 된다”하고 자리 위에 올라서 절하도록 하고 답례로 절했다. 그 후 잠시 삼각산 청량사(淸凉寺)에 이자현을 머무르게 하고 예종이 내왕하며 선학(禪學)의 교리를 질문했다. 하지만 이자현은『심요(心要)』한 편을 저술하여 올리고 나서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청평산 문수원기(淸平山文殊院記)>에는 예종이 이자현을 사모하는 마음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고 우대한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자현은 죽은 뒤 진락(眞樂)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진정한 즐거움을 아는 자라는 의미일 것인데 진정한 즐거움이란 무위에서 이뤄진다고 장자가 말한 지락(至樂)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 보다 더 큰 자아인 본성에 내맡기는 행위에서 이뤄지는 즐거움.
거의 천 년 전 인물 이자현이 자적한 깊은 산 입구로 나는 다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청평사 선착장에 내려 청평교에 가까워질수록 소양호로 흘러드는 계곡의 물소리는 겨울에도 아랑곳없이 세차게 들렸다. 내가 감각하기에 지난봄보다 더. 맞구나. 춘천의 진정한 봄은 겨울 맞구나. 청평교에서부터 감탄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물길을 거슬러 청평사 회전문 앞에 이르기까지 소란스러운 마음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건 오직 물소리. 아홉 가지 소리로 들린다고 해서 이름이 구성(九聲)인 폭포도 있었으니. 이 폭포는 주변에 아홉 그루 소나무가 있어서 예로부터 구송(九松) 폭포라고 불렸지만 가장 큰 수인 구를 써서 폭포의 다채로운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구성이라는 이름이 그 폭포에 걸맞다고 혼자 생각했다.
잠깐이나마 물소리에 정화되어 본심이 회복된 것일까. 나는 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물소리가 하도 커서 소리 내 울어도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같은 길. 울기 좋은 길을 오르며 나는 나보다 앞서 가지 않고 나와 나란히 걷는 것 같았다. 물소리에 내가 나에게 한걸음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산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그 물소리. 내 안에 깃든 맑음과 평화로움을 잠시나마 체험하게 한 그 소리는 내가 아는 가장 감동적인 연주이고 합창이다. 물방울의 연주와 합창은 청평사 회전문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그 길에 진동한다.
청평사가 자리한 산 이름은 원래 경운(慶雲)인데 <청평산 문수원기(淸平山文殊院記)>에 따르면 이자현이 그곳에 은거한 뒤로 도둑도 없어지고 호랑이도 종적을 감추었다고 해서 산 이름을 청평(淸平)으로 고쳤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청이란 맑은 물소리이며 평이란 본래의 마음의 평화를 회복한다는 의미로 풀이하고 싶다. 또는 본심의 맑음과 평화를 되찾는다는 의미로. 청평사 가는 길 따라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눈물이 난 것은 맑음과 평화 등의 성질을 지닌 본래 성품이 잠시나마 회복되었기 때문일 테니까. 마음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이 물소리에 걷힌 순간에.
우리 마음의 소리도 본래 그와 같은 물소리로 내내 흐르고 있지 않을까. 청평사 가는 길에는 평소 잘 알아차리지 못한 마음의 물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