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저장소

해결되지 않는 모든 순간을 위한

by zejebell

매일매일이 힘들지 않은 날이 없겠지만 유독 힘든 날이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그런 날이면 나는 내 내면으로 들어가 심리적으로 웅크리고 있고 싶다. 나의 신체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에 마음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어쩌면 내가 기대고픈 어떤 이에게 연락하여 내 상황에 대해 기나긴 푸념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급적 그런 충동이 들어도 참을 수 있다면 그러지 않으려 노력한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면 나의 괴로움이 응석으로만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에게 나의 부정적이고도 힘든 기분을 넘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나의 괴로움이 그의 마음에 닿지 않음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의 괴로움에 허우적대고 있고 그 또한 그만의 괴로움에 빠져 나의 힘듦과 그의 힘듦이 서로에게 닿지 못함을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공허하게 느껴지는 말들이지만 서로의 진심을 느끼기 위해 노력하며 대화를 마치게 된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내 앞에 후회와 더불어 던져져 있다.


차라리 힘든 날이 오면 그때를 대비하여 만든 나만의 저장소에서 저장해 둔 나를 위로해 줄 좋은 글귀들을 꺼내 읽는다. 훌륭한 작가들이 쓴 좋은 글귀들은 그날이 왔을 때 내가 표현하고 싶으나 잘 표현할 수 없는 그 심정을 콕 짚어 시원하게 꺼내준다. 그들은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종류의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로운 글귀들이 나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데 전혀 모자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면서 여러 가지 대비를 하며 산다.(물론 그렇지 않은 삶의 철학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돈이 떨어질 때, 무언가에 대한 지출이 필요할 때를 대비하여 저축을 하거나 음식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식료품을 저장하기도 한다. 또한 당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사탕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때론 폭설이나 태풍에 대비해야 할 때도 있다. 시험에 대비해 공부를 하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하거나 식이요법을 하기도 한다. 집에 어린아이가 있다면 상비약을 반드시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이렇듯 삶의 모든 부분에 걸쳐 저마다 필요에 따른 저장소가 있다.


삶이 넓은 바다의 높은 파도를 타고 있을 때는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파도가 자신의 삶을 밑으로 내동댕이 칠 때야 비로소 넓은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간신히 삶의 조각을 부여잡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때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저 살기 위해 버티는 것뿐이다. 자신이 만들어 두었던 저장소로 들어가서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아 있을 수 있기 위해 무엇이라도 꺼내 버텨내야만 한다.


그러니 버텨내기 위해서는 뭐라도 채워진 자신만의 저장소가 꼭 필요하다. 남들이 생각하는 기준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저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힘든 날 나를 위로해 주거나 다시 일어날 힘을 줄 수 있는 것들로 채워진 저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해답이라는 구조대가 미래에서 도착할 때까지 삶을 붙잡고 있게 해 줄 그 무언가가 들어 있어야 한다. 누구는 절실함으로 붙잡을 것이고 누구는 내려놓음으로 오히려 붙잡게 될지도 모른다. 저장소에 있는 무언가는 지금 당장 꼭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마술처럼 날 도와줄 무언가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좋은 기억, 꿈, 생각 등이 있을 수 있다. '엄마, 아빠'라고 처음 불러주었던 목소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여행,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꼈던 감동의 순간, 내가 '추억'이라고 부를만한 그리움. 꼭 기억하고 싶은 글귀, 사랑하는 사람들, 마음에 닿았던 예술들, 맛있는 것을 맛보았던 기억.... 그냥 여유롭게 낮잠을 잘 수 있었던 오후. 어쩌면 너무도 힘든 그 순간에 내 안에 웅크리고 들어가 이런 것들을 꺼내 볼 수 있다면 너무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 없는 순간일지라도, 너무 무기력해지거나 슬퍼져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조차도 조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그 순간을 누그려 뜨려 줄 시간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지리멸렬한 현재를 참고 또 참다 보면 언젠가는 해답이 존재하는 미래를 살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당신 마음속의 해결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인내를 가져주십시오. 그리고 물음 그 자체를 닫혀 있는 방처럼, 아주 낯선 말로 쓰인 책처럼 사랑해 주십시오. 지금 당장 해답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아마도 당신이 해답에 맞추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당신에게 그 해답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산다는 것은 긴요한 일입니다. 지금은 물음을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아마도 당신은 차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먼 미래의 어느 날, 해답 속으로 들어가서 해답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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