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 Feb 05. 2024

힘 빼기 연습

나를 알아가는 일

‘유리 멘탈’로 유명한 나는 한 번 기가 죽으면 잘 하던 것도 못하는 ‘음메기죽어’ 병이 있다.


이 병은 평소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쿠크다스보다 더 파삭거리는 내 멘탈을 갉아먹는다. 잘하고 싶은 욕심을 낼수록 끈질기게 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다.


특히 몸을 써야 하는 스포츠에서 그렇다. 이십 대 초반에 친구 커플과 볼링을 치러 갔을 때, 전부 내 등을 쳐다보고 있다는 부담감에 계속해서 공은 도랑으로 빠졌고, 그 도랑으로 내 멘탈도 함께 빠지는 바람에 처참한 스코어를 맞이했다. 다들 괜찮다 괜찮다 했지만 하나도 즐기지 못하고 하루 종일 시무룩했다.


남편이 남자친구이던 시절 함께 스쿼시를 배웠을 때는, <해리 포터>의 골든스니치 처럼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고무공과 사투하다 스스로에게 화가 난 나머지, 애꿎은 그와 크게 다툰 날도 있었다.


‘스쿼시의 난’을 다행히 넘기고 결혼한 남편과 함께 2:1로 테니스를 배운 지 6개월이 넘어간다. (그 이후에도 계속 같이 운동하자고 해주는 남편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왕초보일 때는 그저 타이밍 맞게 공을 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뿌듯했다. 점점 재미를 붙이고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자, 한동안 잔잔했던 멘탈의 바다에 조금씩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잘해야 되는데, 왜 이렇게 안되지’라는 패배감에 유난히 빠지는 날이 있다. 코치님이 치기 좋게 내 앞에 갖다주는 공도 8할은 네트를 넘기지 못하기 일쑤다. 그런 나를 너무 잘 아는 남편은 뒤에서 ‘나이스!! 자신감 있게!!’를 외쳐준다. 하지만 한번 고꾸라진 자신감이란 녀석은 자전거처럼 휙휙 빠르게 방향을 바꾸기가 어렵다. 그 녀석은 마치 거대한 크루즈선 같아서 날씨와 풍속과 암초를 모두 고려한 뒤에야 서서히 방향 키를 돌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피겨여왕 김연아나 양궁선수 안산 처럼 대쪽같고 대범한 멘탈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

멋진 그녀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힘을 뺄 줄 안다는 것.

김연아 선수의 다큐멘터리 중 화제가 되었던 말이 있다. 연습할 때 무슨 생각 하세요? 라는 질문에 "생각은 무슨, 그냥 하는 거지 뭐..."라고 했던 답변. 평소 동경해왔던 사람이라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는데 그녀의 답은 의외로 싱겁고 가벼우면서도 여운이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밴쿠버 올림픽에서도 ‘꼭 금메달을 따야지’보다는 ‘그냥 늘 하던 경기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티끌 하나 없는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고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올림픽 사상 첫 양궁 3관왕이라는 타이틀로 작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안산 선수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여자 개인 결승 슛오프 때 어떤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이런 말 해도 되나. ‘쫄지말고 대충 쏴’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어요."


"목적은 어차피 한 가지밖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한 후 나머지는 마음을 비우는 게 상책이다. "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마음을 비우기. 우리는 운동이 아주 정직한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의 나 자신과 견주었을 때 조금이라도 나아진 부분이 있다면 그것으로 된 거다. 게다가 난 테니스 선수도 아니고 그저 재미와 건강을 위해서 시작한 것일 뿐인데? 즐겁고 건강하면 된 거지 힘주고 욕심낼 이유가 전혀 없다.


누군가 요가 수업에서 들은 말이라고 했던 구절이 떠오른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중심을 잡으세요, 하나 망친 것에 집중하지 말고 과거는 흘리세요.’


지금보다도 더 초보일 때 기록해둔 테니스 일지를 오랜만에 펼쳐봤다. 그땐 가만히 서서 치는데도 쉽사리 공을 네트 너머로 넘길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 공은 '탕!' 소리가 나는데 내 공은 '뻑!' 소리가 났다. 지금은 뛰어다니면서도 이쪽 저쪽으로 날아오는 공 10개 중 7~8개 정도는 '탕!' 하고 칠 수 있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다. 공을 서로 주고받는 랠리도 2번 연속으로 하는 것이 힘들었다. 실력은 천천히,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계단식으로 늘어서 요즘은 랠리 5번, 7번을 넘어서 10번 주고받는 것을 목표로 치고 있다.


이번 주 수업에서는 이렇게 나를 달랬다. 김연아 선수와 안산 선수의 덤덤한 톤을 잠시 빌려서.

‘아니 대회 나갈 거야? 그냥 힘 빼고 즐겨’


부담감을 10g 정도는 덜어두고 형광 연두색 볼을 탕- 친다. 기분 탓인지 경쾌하게 날아간다.

내 욕심과 불안함도 그 김에 날려 본다.

작가의 이전글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