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쓰는 출산일기_가족을 완성시킨 자연주의 출산 이야
아내가 나에게 임신 소식을 전해 준 것은 5월 27일 금요일이었다. 임신테스트기를 통해 임신을 확인한 아내는 전화로 나에게 소식을 전했다.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임신이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그 순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늘 보아왔던 그런 반응들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다소 무던한 반응에 아내는 약간 실망했던 것 같다.
임신 사실을 듣고 나서 결전의 그날이 언제였을지 되짚어보니 5월 연휴를 맞아 강원도 여행을 갔던 시기였다. 둘이 갔다가 셋이 돌아온 여행. 가끔 우스갯소리로나 들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아이의 태명은 둥글이로 지었다. 아내는 항상 바다에 둥둥 떠 있다 해서 나를 “둥”이라 불렀는데, 태명에 “둥”을 넣고 싶어 했다. 둥글둥글하게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첫 아이는 둥글이가 되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 주 토요일, 정확한 확인을 위해 아내와 산부인과를 찾았다.
“임신이 맞네요. 축하드려요. 4주 정도 되셨어요.”
임신테스트기를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의사 선생님을 통해 직접 전해 듣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예정일은 내년 2월 1일입니다.”
출산 예정 날짜까지 정해지고 나니, 그제야 40주짜리 마라톤 트랙에 올라선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 둥글이의 크기는 0.32cm였다. 손바닥 만한 초음파 사진에서 새끼손톱보다 작은 태아를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에게는 희고 검은 그 흑백사진이 세상 어느 사진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요즘도 가끔 주변에서 아이 사진이라며 초음파 사진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 눈에는 특별할 것 없는 그 사진이 예비 엄마, 아빠에게는 무엇보다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당시의 나는 충남 계룡에 있는 해군본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에 나가는 것보다는 여건이 좋았지만 주말부부로 지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아내는 경기도 고양에 있는 신혼집에서 생활했는데 그나마 대학생 처제가 함께 지내는 것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집에서 함께 있는 시간은 금요일 자정부터 일요일 저녁식사까지였다. 아내는 금요일 밤부터 목소리가 밝아졌지만 일요일 오전부터 급격히 우울해졌다. 일주일에 이틀, 한 달에 8일밖에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자 나도 고민이 많아졌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더라도 아내와 둥글이에게 마음을 전할 방법을 찾다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임신 8주 차부터 쓰기 시작한 편지는 출산 후까지도 이어졌다.
아내와 함께 있지 못해 미안한 마음, 둥글이에게 바라는 모습, 해주고 싶은 말들... 여러 주제로 매일 편지를 썼다. 그중 가장 많은 내용은 아내의 입덧이 심해지지 않기를 바라며 둥글이에게 애원하는 내용이었다.
“둥글아, 오늘은 엄마가 좀 먹을 수 있게 도와주렴.”
임신 6주 차가 되면서 아내의 입덧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둥글이가 찾아온 것을 알게 된 후 기쁨과 기대에 부풀었던 시간은 찰나였다. 입덧이 시작된 아내는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에 매주 산부인과에서 수액을 맞아야 했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밤 통화를 하는 것과 주말에 병원에서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47kg이던 아내의 체중은 3주 만에 42kg까지 줄었다. 먹을 수 없으니 몸에 힘이 없었고, 힘이 없으니 아내는 하루종일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둥글이는 아내의 몸 상태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건강하게 자랐다. 감사한 일이었다.
“둥둥둥둥”
1분에 132번. 처음 들은 둥글이의 심장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6mm밖에 되지 않는 몸에서 어떻게 그렇게 힘이 넘치는지 심장소리는 세상을 채울 듯 맥동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사 선생님이 스피커 볼륨을 많이 키워 놓았던 것 같긴 하지만 그때는 가슴까지 울리는 고동 소리가 너무 감격스러워 그런 생각을 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매주 산부인과를 찾을 때마다 베일을 벗기듯 둥글이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갈 수 있었다. 손가락, 발가락 개수가 10개라는,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사실조차 태아에게는 계단처럼 딛고 올라야 할 미션이었다.
12주 차가 되면서 태아의 다운증후군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투명대 검사를 했다.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 화면을 유심히 들여보는 동안의 초조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저 부분을 왜 이렇게 오래 보는 거지?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내가 충격받지 않도록 할 말을 고르느라 시간이 걸리는 것 아닐까?’
침묵 속에서 답을 기다리는 그 시간은 마치 억겁과 같았다.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합니다”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나는 그제야 진정 이해할 수 있었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케케묵은 옛말이 얼마나 큰 진심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둥글이의 건강을 확인한 날, 나는 내가 가진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달았다. 결혼과 임신, 건강한 아이를 만나 가족을 만들어 가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생각이 닿았다. 주변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우리의 행복만 바라는 내 모습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왔다. 이제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는데 나 혼자서 모든 행복을 갖는 것은 이기적인 것 아닐까?’
둥글이도 결국 주변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사회가 함께 행복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로 아동후원재단에 가입했다. 지금도 후원은 계속하는 중이다.
임신 중반을 지나면서 아내의 배가 점점 불러왔다. 여전히 입덧이 있었지만 초기보다는 많이 나아져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많이 늘어났다. 계속 줄어들기만 하던 몸무게도 양수와 둥글이의 영향인지 다시 늘기 시작했다. 27주 차에 두 번째 입체초음파 검사를 하였다. 입체 초음파 검사는 일반 초음파와 달리 아이의 형상을 3D 입체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검사다. 이미 12주 차 첫 번째 입체초음파 검사를 했었는데, 이때는 둥글이의 머리통과 팔다리 형상만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입체초음파 검사는 달랐다. 우리 부부는 이날 둥글이의 얼굴을 처음으로 선명하게 보았다.
어느새 쑥쑥 자라 한 화면에 담을 수도 없는 둥글이는 슬며시 얼굴 반쪽을 내보여 주었다. 감고 있는 눈과 작은 코, 심통 난 듯 불퉁한 볼과 입까지... 마치 아이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 생생한 모습이었다.
출산이 점점 다가오자 아내는 둥글이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양가 어르신께서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아내가 전적으로 맡아 이름을 지었다. 작명 센스가 없는 나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후보에 올랐던 이름은 “지안, 아인, 재인, 리안”. 오랜 고민 끝에 둥글이는 “리안”이 되었다.
둥글이에서 리안이로. 아내의 노력 덕분에 둥글이는 예쁜 이름을 갖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작명을 아내에게 맡긴 것은 참 잘한 일이다.